[베를린에서] 독일에 때아닌 자본주의 논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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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유권하 특파원

독일에선 때아닌 '자본주의 논쟁'이 한창이다. 집권 사민당 프란츠 뮌터페링 당수의 지난달 11일 발언이 도화선이 됐다. 뮌터페링은 "독일을 포함한 전 세계가 초국가적인 자본의 무자비한 힘에 휘둘려 국가 기능이 크게 위축됐고, 그 결과 민주주의가 뒷걸음치고 있다"며 자본주의 체제를 호되게 비판했다. 그는 또 "독일 내 다수 기업이 이익만 챙긴 뒤 사회적인 책임은 외면한 채 메뚜기처럼 해외를 옮겨다니고 있다"고 비난했다.

정통 좌파에서 '신중도'로 노선을 바꾼 사민당의 최근 정책과는 맞지 않는 발언이었다. 사민당 출신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는 노동자와 복지 우선 노선을 뒤로 하고 친기업적인 정책을 쏟아왔던 터다. 사민당이 사활을 걸고 추진 중인 개혁정책 '어젠다 2010'도 복지를 축소하고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려는 취지에서 나왔다.

그동안 사민당의 '우파 성향' 정책에 소외감을 느껴왔던 노동계는 뮌터페링의 발언을 일단 환영했다. 독일노조 총연맹(DGB) 미하엘 조머 위원장은 "많은 기업이 종업원을 무자비하게 내쫓고 노동자의 권리를 장애물로 여기고 있다"고 맞장구쳤다. 그러나 재계는 거세게 반발했다. BMW와 코메르츠 방크 등의 최고 경영진들은 "기업이 공격당하고 투기 자본이 악마처럼 여겨진다면 새 일자리를 만들어 낼 수 없을 것"이라고 불만을 나타냈다.

슈뢰더에게서 당수직을 물려받은 뮌터페링의 '강력한' 발언 배경에 대한 논란이 거세게 일고 있다. 좌파를 끌어모으기 위한 선거용이란 지적이 다수다. 사민당이 22일로 다가온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회 선거에서 지지율이 떨어지자 위기의식을 느꼈다는 것이다. 이 지역에서만 39년 동안 집권해온 사민당의 아성이 무너지면 내년 총선에서도 승리를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일간 디 벨트는 "뮌터페링의 발언은 투표장에 나가지 않으려는 사민당원들에게 외치는 소리이자 선거용 전술이 분명하다"고 분석했다. 일부에서는 "슈뢰더 정권이 정통 좌파로 방향을 전환하려는 신호탄"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유권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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