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노래운동 선봉 문승현 교수…시대를 읊는 오선지 다시 울릴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9면

"문승현이는 소련으로 가고 거리엔 황사만이 그가 떠난 서울 하늘 가득 뿌옇게, 뿌옇게 아 흙바람…" 정태춘의 음반 '92년 장마, 종로에서' 에 수록된 노래 '사람들' 의 시작이다.

이른바 노래운동에 몸을 던졌던 정태춘은 문승현이 없는 자리가 그토록 스산했을까. 문승현이 누구길래. "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386세대들이 군사정권 아래서 그토록 지겹게 불러 젖히던 노래 '그날이 오면' 을 만든 문승현. 문외한에게도 그는 적어도 80년대 노래운동의 선봉으로 알려져 있다.

문승현은 나이 40에 고국에 돌아왔다.

5년여만에, 그것도 아주 조용히. 그가 이미 충남산업대학 방송음악과 교수가 되었다는 사실에 그의 노래운동 동지조차 놀라고 있을 정도다.

우리 시대 고뇌하던 '지식인 - 운동가 - 예술가' 의 전형은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노래를 찾는 사람들' 을 조직했던 사람. 노래운동 창작집단인 '메아리' '새벽' 의 리더. 밀리언셀러 음반 '사계' 의 작곡자. 그러면서도 그는 "노동자의 정치적 당파성" 만을 배타적으로 인정하는 작품들을 '노래 운동의 전형' 으로 삼는 데는 철저하게 반대했다.

그의 말. "92년 노래운동은 '착종 (錯綜 : 섞이어 엉클어짐)' 상태였다.

나아가서 타도대상이 점차 모호해져 변혁운동조차 파행을 면치 못했었다.

어디론가 떠나는 방법뿐이었다. "

애초 음악을 연구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모스크바대학에서 사회주의 역사공부를 하고 싶었다.

'1세기만의 사회주의 항복선언' 원인규명 같은 것. 그러나 우연히 찾아간 모스크바 음악원 (일명 차이코프스키 음악원) 의 차이코프스키 동상앞에서 교직원을 만나 긴 얘기를 나눈 게 인연이 되고 말았다.

이 학교에 입학한 최초의 한국인 문승현은 음악도가 아닌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의 운동권이었던 것이다.

클래식 음악전통에의 도전과 러시아 언어와의 싸움은 고달픔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최고성적의 졸업을 눈앞에 두고 그는 현대음악 공동화 상태인 동구의 음악세계에 질식할 것 같은 답답함을 느꼈다.

그는 프랑스 파리의 음악음향연구원 (IRCAM) 을 새롭게 떠올렸다.

이번엔 프랑스어를 공부하면서 전세계의 음악인들이 선망해 마지 않는 이 음악연구원에서 석사 및 고등연구학위 (DEA) 를 잇따라 단 2년만에 마쳤다.

전공은 현대음악 및 컴퓨터음악. 그에게선 작고한 윤이상 선생의 이미지가 풍긴다.

40여년전 경제.문화가 북한에 뒤져 있던 당시 무작정 파리로 떠나 현대음악을 접하고 스트라빈스키.쇤베르크 등의 무조 (atonal) 음악.음열 (serial) 주의 등을 파고들기 위해 독일로 옮겨간 윤이상. 언어 습득에 관해선 그가 윤이상보다 한수 위였던 것으로 보인다.

문승현이 딛고 서야 할 지금의 자리는 어디인가.

그것은 이제부터 시작되는 그의 '음악 운동' 이 말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음악으로 할수 있는 모든 일을 하겠다.

모스크바.파리에서 익힌 음악적 전문성.선진성의 토대 위에서…. " 첫 모습은 한국식 공포영화 '여고괴담' (박기형 감독) 의 음악을 통해 드러날 것이다.

컴퓨터.전자악기들이 만드는 자연의 음향을 공포영화의 작품 구성요소로 사용하는 게 바로 그것이다.

얼마나 아슬아슬한 작업인가.

이 작업을 시작으로 그는 긴 음악행진에 들어간다.

70년대식 통기타 음악, 80년대 운동가요, 모스크바에서 익힌 정통 클래식의 유산, 파리의 최첨단 기술과 음악과의 만남 등. 어쩌면 궤적은 카오스적일 것 같다.

아니면 치열한 방황. 적어도 그의 존재와 작품이 다양한 방면에서 논의와 관심의 카오스에 빠져들 것은 분명하다.

홍성 = 채규진·문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