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못난’ 스승 두 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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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두 분을 떠올린 건 두 시인이 며칠 전 펴낸 책 덕이다. 김지하 시인의 『못난 시들』과 신경림 시인의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에 두 어른 얼굴이 어렸다. 우연히 겹친 ‘못난’이란 단어 때문이었을까. 그러고 보니 김지하 시인은 장일순을, 신경림 시인은 민병산을 저마다 선생님으로 모셨으니 ‘못난’이란 말이 나란한 건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

민병산 선생은 ‘거리의 철학자’요, ‘한국의 디오게네스’란 별명으로 더 이름났던 분이다. 굳이 세상의 잣대로 가르자면 문필가이자 서예가였고 전기(傳記) 연구가이면서 바둑 애호가였다. 1960년대 초부터 ‘새벽’ ‘사상계’ ‘세대’ 등 여러 잡지와 일간지에 에세이와 칼럼을 썼는데 높은 식견이 바탕을 이루면서도 해학과 풍자가 넘치는 담백한 글로 독자 마음을 울렸다.

신경림 시인은 민병산 선생을 이렇게 기렸다. “사람들이 수없이 도전하고 좌절하고/절망하고 체념한 끝에 비로소 이르는/삶의 벼랑에 일찌감치 먼저 와 앉아/망가지고 부서진 몸과 마음/뒤늦게 끌고 밀고 찾아오는 친구들/고개 끄덕이며 맞는 그 편하디 편한 눈. (…) 세상을 사는 데는 그렇게 많은 지식이 필요 없는 법이라고/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 없는 법이라고/그렇게 많은 행동이 필요 없는 법이라고.”

장일순 선생은 60년대부터 강원도 원주에서 군부독재를 비판하며 평화생명운동을 펼쳤던 사상가다. 동학 제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의 ‘이천식천(以天食天·하늘이 하늘을 먹고 산다, 우리가 다 하늘이다)’ 말씀에 눈떠 풀뿌리 민중을 섬기는 비폭력주의를 몸소 실천으로 여러 후학에게 가르쳤다. 노장 사상에 밝아 나락 한 알 속에서 우주를 읽었고, 일상에서 건져 올린 깨달음으로 생활글씨와 난 그림을 남겼다.

김지하 시인은 장일순 선생이 던져주신 두 가지 말씀이 나이 들수록 생각나고 또 생각난다고 했다. “밑으로 기어라”와 “무엇을 이루려고 하지 말라”다. 한 문명 자체가 바야흐로 종말을 고하려 하는 시점이자, 지구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그런 국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의 방향이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해 결정적으로, 결단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하는 위기에 처해 있다.

그렇기에 “민중은 삶을 원하지 이론을 원하지 않는다”하셨던 장일순 선생, “부귀는 짐스러운 것, 명예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우스운 것”이라며 내쳤던 민병산 선생이 ‘못난’ 스승이었을지 모르나 이제 와 돌아보면 미래를 내다본 진정한 지도자였다. 두 어른은 한없는 낮춤으로 자신을 이웃에 바쳤다. 누군가 “죽은 다음에 천당 가는 건 중요하지 않습니까” 했더니 장일순 선생 답이 이러했다. “그런 거 생각 안 해요. 천당이고 지옥이고 다 여기 있으니까.”

세계적인 경제위기의 복판을 지나는 와중에도 이 땅에서는 빌미 잡힌 놈의 그 무슨 끄덩이라도 잡아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식의 무도(無道)가 횡행하고 있다. 소설가 황석영씨는 비행기 한번 잘못 탔다가 좌우 양쪽으로부터 난타당하는 형편이고, 시인 황지우씨는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 운운하는 이 나라의 전설적인 올가미에 잡혀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직을 내던졌다. 어느 쪽에 서 있건 입달린 자마다 이러쿵저러쿵 훈수를 두는 판국이니 두 황씨를 놓고 떠드는 모양새가 가관이다. 이런 사태를 보다 못한 김지하 시인이 한마디 거들었으나, 어느 결에 이미 시효가 지난 지식인으로 몰리는 형국이다.

한 개인, 사회, 문화 어디에도 금도(襟度)는 있어야 한다. 이 시대에 무엇인가를 주장하는 언어들은 하나같이 과잉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비판의 언어들은 칼처럼 날서 있다. 그 원인을 따져 보는 일이 중요하긴 하겠으나, 그러나 일단 ‘하고 싶은 말의 80%만 하기’, 이런 캠페인은 어떨까. 권력은, 하고 싶은 일의 80%만 하고…. 에너지 절약은 물론, 마음 건강에도 큰 보탬이 될 듯하다. 장일순, 민병산 선생이 갈파하셨듯 부귀와 명예가 부질없고 천당과 지옥이 다 여기 있으니 하는 말이다.

정재숙 문화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