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재현의 시시각각

‘노근리’를 추모하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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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1999년 9월 AP통신이 ‘노근리 학살’을 특종 보도하면서 사건은 비로소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한·미 공동조사가 이루어졌고, 클린턴 당시 미 대통령이 나서서 공식사과를 했다. 2004년 3월에는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다. 후유 장애자들에게 의료비가 지급됐고, 191억원의 예산이 책정돼 ‘노근리 역사공원’도 만들기로 했다. 지난해 6월에 공사의 첫 삽을 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정부와 노근리 피해 유족들이 갈등을 빚고 있다. 노근리 역사공원의 명칭 문제와 공원 내에 교육관을 건립할지 여부가 갈등의 핵심이다. 유족들은 ‘역사평화공원’으로 하자고 하고, 주무 부서인 행정안전부의 노근리사건처리지원단은 ‘역사추모공원’이 더 적절하다며 맞서고 있다. ‘평화’와 ‘추모’의 대결이다. 유족들은 또 ‘노근리를 국제적인 인권존중과 평화애호의 메카로 만들기 위해’서는 숙박시설이 포함된 교육관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내외 방문객·연구자들을 대상으로 중장기 레지던스(residence) 프로그램을 운영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행안부 지원단은 희생자 위패를 모신 곳이므로 숙박시설은 적당하지 않고, 유지보수비와 인건비 때문에 두고두고 예산만 낭비할 것이라며 반대다.

나는 행정안전부 측 손을 들어주고 싶다. 노근리 사건은 그 자체로도 엄청난 비극이지만, 한국전쟁이라는 더 커다란 비극 속에서 볼 필요도 있다. 한국전쟁은 한국군과 북한군·중국군, 미군과 유엔 참전군이 뒤섞여 벌어진 일대 참화였다. 민간인 학살만 해도 한반도 전역에서 남·북 양쪽이 두루 저질렀다. 특히 노근리 사건의 가해자인 미군은 이 땅의 수많은 전장에서 막대한 인명피해를 냈다. 다른 나라도 아닌 우리 대한민국을 지켜주기 위해서였다. ‘한국전 참전은 미국의 세계전략의 일환’이라고 마치 남의 말 하듯 할 일이 아니다. ‘평화’나 ‘추모’나 비슷해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엉킨 한국전쟁의 전체 성격을 감안하면 고인들의 한을 풀어 드리고 영령을 위로하는 뜻에서 ‘추모’로 하는 게 더 적당하다고 본다.

유족들은 250명가량을 수용할 수 있는 교육관을 짓는다는데, 행안부가 반대하는 이유도 새겨들을 만하다. 거창사건 희생자 추모공원 같은 기존 시설도 방문객이 적어 파리를 날리는 형편이다. 과연 세금 먹는 하마가 되지 않게 운영할 자신이 있는 것일까. 지자체가 욕심 부려 거창한 시설을 지어놓고 국민 세금만 축내는 사례를 우리는 너무나 많이 보아 왔다. 게다가 ‘노근리 사건’을 내건 교육관에서 청소년들을 모아놓고 어떤 것들을 교육할지도 지레 걱정이 든다. 노근리의 비극만 가르치고 노근리 사건 후 불과 두 달 뒤에 북한군이 무려 1557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대전지역 적대세력사건’ 같은 것은 외면할까 봐 하는 소리다. 혹시라도 편향된 반미교육의 장(場)으로만 이용된다면 교육적으로도 옳지 않다. 아무튼 정부와 유족들의 갈등이 원만하게 해결되길 바란다.

16개나 되는 과거사 관련 위원회가 너무 방만하고 중복되게 운영돼 왔다는 비판도 많지만, 나는 억울한 희생자와 유족들을 신원(伸寃)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한국전쟁은 이제 좌·우를 떠나 모든 희생자를 고르게 추모할 여유가 생겼다고 본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