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주를 열며]본래의 슬픔을 봐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월전에 나는 '홍도야 울지 마라' 와 '눈물 젖은 두만강' 을 각기 관람할 수 있는 입장권 여러 장을 선물 받았었다.

그 극을 보면서 실컷 울 수 있었던 노년층 불교 신자들이 한두 장씩 선사한 표들이었다.

"우는 것이 속을 시원하고 편안하게 해준다" 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오직 그것만을 위해 수차례 관람했다는 이도 있었다.

음반 가게에서 흥미로운 판을 구입한 적이 있다.

슬픔을 노래하는 곡들만 모은 것이다.

도니제티의 '남몰래 흐르는 눈물' , 리스트의 '사랑의 꿈' , 프로코피예프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별 전에' 등이다.

이 판은 또 유명한 오페라 가운데 슬픔의 장면들을 소개하기도 한다.

푸치니작 '토스카' 의 '토스카의 번민' , 바그너작 '트리스탄과 이졸데' 의 '이졸데의 사랑의 죽음' , 레온카발로작 '팔리아치' 의 '슬픈 광대' 등이다.

한데 이 판이 더욱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슬픔의 이유와 그것을 해소하는 처방을 11가지씩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슬픔의 원인으로는 생로병사.배신.가난.실직.낙방.의사불통 등을, 그것을 삭이는 방법으로는 실컷 울거나 웃기.배 터지게 먹기.쇼핑.푹 자기.음악 듣기.음주 등을 든다.

홍콩 무술영화를 보면 대부분 복수극으로 이뤄져 있다.

악한들이 불시에 침입해 무참하게 부모를 죽이고 집에 불을 지른다.

어린이는 울면서 그 장면을 본다.

그 아이는 자라면서 울음은 멈추지만 부모의 죽음을 떠올리며 깊은 슬픔에 잠긴다.

그리고 오직 복수를 생각하며 일생을 산다.

극.영화.음악.소설에만 슬픔이 있지 않다.

부모가 살해당하는 것을 목격한 아이에게만 슬픔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도 있다.

누구든지 늙고, 병들고, 배신당하고, 실패하지 않고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움직임을 잘 관찰해 보자. 돈.명예.권력을 잡으려 하는 이들은 복수하려는 아이가 죽자살자 무술을 연마하듯 슬픔을 삭이기 위해 힘을 축적하려는 것이 아닐까. 웃음에 허기 들린 것처럼 웃음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 떠들며 술 마시고 노래하는 사람들, 또는 과식해서라도 육체를 학대하지 않고는 심심해 못 견디는 사람들도 모두 슬픔을 피하기 위해 저리 하는 것이 아닐까.

석가는 우리의 현실을 고통으로 규정한다.

다겁생래 (多劫生來) 로 슬픔을 안고 태어난 인간은 그것으로부터 피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는데 그 시도가 욕망으로 나타난다.

욕망의 뿌리가 슬픔이라서 여기에는 자학성이 담겨 있다.

원하는 것이 얻어지거나 말거나 똑같이 아프다.

욕망의 본래 목적은 슬픔을 피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가지의 성취로 만족되지 않는다.

반드시 또 다른 것을 원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더 괴롭고 슬퍼지게 된다.

축적된 슬픔을 삭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간단하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하면 된다.

비극을 보고 울어서 속을 풀듯이 말이다.

희극도 상관없다.

그 뒤에는 반드시 고달픈 인생에 대한 조망과 슬픔이 깔려 있다.

그런데 무대에 올려진 비극은 밖의 것이다.

나의 체험과 이야기에서 슬픔을 보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체험은 제한돼 있다.

사람마다 세상의 모든 고통을 직접 겪을 수는 없다.

내 경험에 의해 모든 슬픔을 다 알 수는 없다.

이때 우리의 본성에 있는 슬픔을 찾아내야 한다.

다겁생으로부터 금생에 이르도록 의식 또는 무의식에 본래적으로 축적된 슬픔을 보아야 한다.

그러면 저 극을 보고 음악을 듣는 것 이상으로 깊은 슬픔에 잠길 수 있다.

영원히 울 수가 있다.

자비와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저 슬픔을 보고 인간의 발악적 몸부림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것이 아니던가.

아무리 악한 사람의 행동도 저 슬픔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미워하고 원망할 것이 없지 않은가.

오직 연민의 정만 생길 것이 아닌가.

석지명〈청계사 주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