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서울대병원의 ‘존엄사’ 첫 단추 환영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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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김수환 추기경이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거부한 채 선종한 걸 계기로 우리 사회의 ‘웰다잉(well-dying)’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 소생할 희망이 없는 환자에게 갖가지 기계장치를 부착해 고통스럽게 생을 마감토록 하는 관행이 과연 옳은지에 대한 반성이 시작된 것이다. 서울대병원이 국내 처음으로 사전의료지시서를 공식 도입해 환자 스스로 연명치료 여부를 선택할 수 있게 한 것도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힘입은 바 크다. 병원 측은 논란의 소지를 줄이기 위해 대상을 더 이상 항암치료가 듣지 않는 말기 암환자로 한정했다. 또 사전에 환자의 상태가 양호할 때 거부권을 부여하는 조치이지, 이미 시행 중인 연명치료를 중단하자는 게 아님을 강조했다. 어쨌든 여론의 뭇매가 두려워 오랜 세월 공론화조차 꺼려왔던 ‘존엄사’의 첫 단추를 서울대병원이 앞장서 꿴 것은 용기 있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그동안 환자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고 가족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는 무의미한 연명치료에 대해 반대 입장을 밝혀왔다. 단, 이 제도가 악용되지 않도록 구체적인 기준과 방식을 규정한 입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올해 초 국회에 발의된 존엄사 관련 법안은 3월 열린 공청회에서 종교계 등이 거세게 반발해 상임위에 상정조차 되지 못했다. 마침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김모씨 가족이 생명 연장 장치를 제거하게 해달라고 제기한 상고심 판결이 내일 나온다. 만약 1, 2심 재판부와 마찬가지로 대법원이 원고 측의 손을 들어줄 경우 향후 입법화가 빠르게 진행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반면 정반대의 판결이 나온다면 존엄사 입법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공산이 크다.

현행 형법상 살인방조죄로 처벌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의료 현장에선 암암리에 연명치료 중단이 이뤄지고 있다. 서울대병원이 이를 양성화하는 길을 열었다지만 법적 효력이 없다는 한계가 있다. 더 이상의 혼란을 막자면 최소한 사회적 합의를 이룬 부분에 한해서라도 법제화가 필요하다. 환자들이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등 치료 여부를 미리 선택하는 사전의료지시서의 경우 지난해 국립암센터가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국민의 93%가 찬성했었다. 정부와 국회는 더 이상 미루지만 말고 우리 사회에 걸맞은 제도적 장치를 구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