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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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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2004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큰 성공을 거뒀지만 장애인 인권단체로부터는 극렬한 비판을 받았다.

이 영화에서 늙은 권투코치 역을 맡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딸처럼 아껴온 선수가 사고로 목 아래 전신마비에 빠지자 독극물 주사로 안락사를 돕는다. 극중에선 본인의 의사를 존중한 행위였지만 장애인 단체들은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장애인들의 의지에 찬물을 끼얹었다”며 항의에 나섰다.

서울대병원이 18일 사실상 존엄사를 인정하는 방침을 발표해 한바탕 논란을 예고하고 있다. 오랜 논쟁거리였던 안락사(euthanasia)라는 말 대신 언젠가부터 존엄사(death with dignity)라는 말이 쓰이지만 두 용어의 혼동으로 인한 혼란도 만만찮다. 엄밀히 말해 두 용어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안락사는 ‘치료 방법이 없어 더 이상의 생명 유지가 무의미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직·간접적 방법으로 고통 없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 중 ‘적극적인 안락사’는 독극물 주사 등으로 환자의 죽음을 야기하는 것이며, ‘소극적 안락사’는 무리하게 생명을 연장하는 치료를 중단하고 죽음을 맞는 것을 가리킨다. 김수환 추기경이나 지난 2005년 선종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경우는 모두 후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대다수 연구자들도 이번 서울대병원의 조치를 비롯해 국내에서 사용되는 존엄사의 의미를 소극적 안락사로 한정하고 있다.

하지만 해외에서의 의미는 다르다. 1997년 발효된 미국 오리건주의 존엄사법(Death with Dignity Act)은 6개월 이내 시한부 생명을 진단받은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독극물 투여를 허용하고 있다. 보수파인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당선 직후인 2001년 약물 관리법을 이용해 이 법을 무력화시키려 시도한 적도 있다. 그러나 2008년 현재 이 법의 적용을 받아 삶을 마감한 환자는 400명을 넘어섰다.

여기에 ‘밀리언 달러 베이비’로 촉발된 논쟁은 이미 존엄사와 관련된 논의가 ‘회생 불가능한 환자’의 한계를 넘어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결정할 권리’를 과연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느냐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여기에 비하면 한국에서의 존엄사 논의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좀 더 적극적인 토론을 통해 각계의 지혜가 모이기를 기대해 본다.

송원섭 JES 엔터테인먼트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