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구조조정 적기” MB가 강조하자 정부도 ‘채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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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왕복 2차선 도로를 달려왔다면 앞으로는 왕복 8차선 도로를 달릴 태세다.”

일러스트=박용석 기자

익명을 요구한 시중은행의 여신담당 부행장은 구조조정에 대한 정부의 의지를 이렇게 표현했다. 한편에선 돈을 풀고, 또 다른 쪽에선 구조조정을 외치는 어정쩡한 모습에서 이젠 보다 명확하게 ‘구조조정 모드’로의 전환이 이뤄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얘기다.

결정적인 계기는 이명박 대통령의 태도 변화다. 중소기업 대출을 줄이는 은행을 질타하던 이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금융위원회에서 열린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 “부실 기업들이 빨리 구조조정돼야 건실한 기업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했다.

18일 라디오 연설 ‘안녕하십니까. 대통령입니다’에서도 이 대통령은 “지금이 구조조정과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적기”라고 다시 한번 구조조정을 강조했다. 그는 “지금의 위기를 도약의 기회로 삼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그동안 우리 사회 곳곳에 누적돼 온 비효율과 거품을 제거하느냐 못하느냐, 미래를 위해 과감한 개혁과 투자를 하느냐 못하느냐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고 말했다. 또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도 너무 서둘러 긴장을 풀어 구조조정과 각종 개혁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대통령의 의중이 확인되자 진동수 금융위원장과 김종창 금융감독원장도 강한 어조로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나섰다. 말로는 은행이 주도해야 한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은행을 지도하는 것은 정부다.

이 때문에 코앞에 닥친 대기업 그룹(주채무계열)에 대한 구조조정이 영향을 받고 있다. 금감원 고위 관계자는 “이번 주까지 재무구조 평가에서 불합격한 대기업 중 주채권은행과 재무 개선 약정을 맺을 기업을 확정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사실 대기업(주채무계열)에 대한 주채권은행의 재무구조평가와 약정 체결은 매년 정기적으로 하는 연례행사다. 위기 시에만 특별히 하는 게 아니다. 지난해의 경우 금융위기가 닥치기 전인 4월에 평가를 완료하고도 6개 대기업의 약정이 체결된 것은 7~8월이었다. 시중은행 여신담당 고위 관계자는 “지난해엔 대기업도 약정 이행에 소극적이었고, 은행들도 특별히 강도 높은 이행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올해 상황은 지난해와 크게 달라졌다. 올해엔 해당 기업들이 매각할 계열사의 내역과 자산을 약정에 상세히 언급해야 한다. 은행도 대기업의 약정 이행 여부를 수시로 평가해 대출 등에서 불이익을 줄 방침이다. 은행이 고객인 기업을 제재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 제기도 만만치 않지만, 정부의 의중이 담긴 것이어서 슬쩍 넘어가기가 어려운 형편이다. 이와 별도로 은행들은 금융권의 대출이 500억원 이상인 1422개 대기업에 대한 신용위험 기본평가에서 430곳에 불합격 판정을 내리고, 세부 평가를 진행 중이다.

문제는 돈이다. 구조조정 차원에서 기업을 팔고 싶어도 사 줄 사람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가격이 너무 내려가도 기업 입장에선 팔기가 힘들다. 이에 대비해 정부가 마련한 것이 외환위기 당시의 공적자금과 유사한 구조조정기금이다. 금융위는 40조원 한도의 구조조정 기금 중 올해 중 20조2000억원을 사용한다는 계획서를 19일 국무회의를 거쳐 국회에 제출할 계획이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본부장은 “정부의 의지가 강하지만 실제로 얼마나 과감한 구조조정이 이뤄질지는 경기에 크게 좌우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준현·서승욱 기자, 일러스트=박용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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