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4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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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모두가 자기 합리나 방어를 위한 말들이지. 스스로가 두렵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된거 아닐까…. 내게 두려움이 있다면 초라한 내 모습에 대한 자각 정도겠지만, 그 사람은 그 정도의 수준은 넘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이젠 그만두지.” “그래요. 그만둡시다.

그런데 영동식당으로 가지 않는 거예요?” “응. 거처를 변식태씨 집으로 옮긴 지 며칠 되었어.” “왜요? 승희란 여자에게 쫓겨났어요?” “따지자면, 그런 셈이지. 나를 주문진까지 태워 주었던 박씨와 동거할 것 같어.” “빠른 속도로 변해가는 것은 시골 사정도 어쩔 수 없군. 그렇지만, 오늘은 그 식당으로 갑시다.

며칠 전에 그림 한 장이 팔렸어요. 아무리 경제한파시대라 하지만, 워낙 헐값에 팔렸다기에 울고 싶었어요. 하긴 깡누구라는 사람이 뒤에 버티고 있어서 멀쩡한 대통령이 깡통령이 됐다는 세상에 이름 없는 화가의 상처받은 자존심쯤이야 대수로운 게 아니죠. 그림값에도 거품이 잔뜩 묻어 있었던 모양이죠.” 식당은 텅 비어 있었다.

성민을 발견한 승희는 꽤나 반겼다.

소주 한 병만 마시기로 약속한 두 사람이 막 식탁을 차지하고 좌정하려는 찰나였다.

선착장 난전에서부터 줄곧 두 사람을 뒤따라온 듯한 사십대 초반의 두 여자가 그들과는 간발의 차이를 두고 식당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식탁을 차지하고 앉으려고도 하지 않고, 안면을 튼 사이도 아닌 한철규를 자못 살벌한 표정으로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선착장 언저리에서 한두 번 마주친 일이 있는 노점상들임이 분명했다.

뭔가 주저하고 있는 눈치를 보이던 한 여자가 비린내를 훅 풍기고 다가서며 말했다.

“당신이 한철규라는 사람이오?” “예. 그런데요?” “우리하고 얘기 좀 합시다.”

“얘기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왜들 그러시죠?”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만, 여기 말고 조용한 데로 가십시다.”

성민에게 앉아 있으라는 눈짓을 건네고, 자못 험상궂은 두 여자를 뒤따라 한길 맞은편 건물의 지하실 노래방으로 들어갔다.

곰팡이 냄새가 설핏한 지하실의 노래방은 아직 조명도 켜지 않은 상태여서 적막하도록 조용했다.

겉치장만 요란한 음향기기들이 놓여 있는 협소한 방에 철규는 떼밀리듯 들어가 앉았다.

좁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 순간, 뜸도 들이지 않고 다짜고짜 들이대는 말은 내일부터 선착장에 벌여둔 난전을 거둬달라는 으름장이었다.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말이었으므로 얼른 대응할 실마리를 찾기 어려웠다.

눈만 크게 뜨고 천장을 쏘아보고 있는데, 으름장을 놓았던 여자가 덧붙였다.

“우리 식솔 다섯이 쪽박 차고 거리로 나서야 댁의 속이 시원하겠소?” “우리가 좌판을 벌인 자리는 선착장 공유지가 아닙니까. 아무나 다닐 수 있고, 난전을 벌일 수 있는 곳인데, 무턱대고 좌판을 거둬달라는 말은 아무래도 억지 같은데요?” “청소비 명목으로 거두는 조합비가 있다는 걸 몰라요? 그런데 당신은 오늘까지 청소비도 물지 않았잖아요.” “청소비를 빙자한 자릿세가 있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만, 우리 일행중에서 물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가 있었어요.” “오년 전부터 물고 있는 자릿세를 어떤 배짱가진 놈이 우습게 알았단 말이오? 그 놈이 누구요?” 윤종갑이라고 바른대로 말할 수는 없었으므로 당장 말문이 막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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