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70년대 <15>‘문인 간첩단’ 사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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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호 13면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소설가 이호철씨(오른쪽) 등 문인들

1973년 12월 24일 각계 지도자급 인사 30명에 의해 발의된 유신헌법 개정 서명운동은 체제에 대한 지식인 저항의 신호탄이었다. 유신이 선포되고 제4공화국이 출범한 지 1년을 눈앞에 둔 시점이었다. 30명 가운데 문인으로서는 박두진·이호철·김지하 등 3명이 참여하고 있었다. 모임에 참여하고 난 뒤 이호철은 문인들만의 독자적인 서명운동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듬해인 74년 1월 7일 이호철은 ‘문학인 61인 선언’의 자리를 만들고 개헌을 위한 100만 인 서명운동에 문인들이 앞장서겠다고 선언했다. 선언문은 백낙청이 기초했다. 이튿날인 8일 대통령 긴급조치 1호가 발동되고 ‘선언’에 참여한 대다수 문인이 남산 중앙정보부에 연행됐다. 이들은 곧바로 풀려나기는 했지만 가택연금 상태에서 엄중한 감시를 받게 됐다.

그러나 그로부터 며칠 뒤 이호철과 정을병 등 두 소설가와 김우종·임헌영·장백일 등 세 평론가가 이번에는 ‘남산’이 아닌 악명 높은 서빙고의 국군보안사령부 대공분실로 연행돼 갔다. 이것이 그로부터 20여 일 뒤인 2월 25일 발표되는 이른바 ‘문인 간첩단 사건’의 시발이었다. 이호철·임헌영에게는 형법상 간첩죄가, 다른 세 사람에게는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위반죄가 적용됐다.

이들이 그처럼 어마어마한 혐의를 뒤집어쓰게 된 빌미를 제공한 것은 일본에서 발행되던 한글 월간지 ‘한양’이었다. 기소 내용을 보면 이들이 ‘한양’을 발행하던 북한 공작원에게 공작금을 받고 정부 전복을 위한 간첩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양’이 창간된 이후 10여 년간의 족적을 살펴보면 그 혐의가 터무니없는 조작임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한양’은 몇몇 재일동포 지식인이 뜻을 모아 62년 3월호로 창간했다. 5·16 군사 쿠데타 직후였는데, 창간호에 ‘혁명공약’ 전문을 실을 정도로 쿠데타 정권에 호의적이었다. 한국 내 필진도 정치적 성향이나 문학적 이데올로기를 고려치 않고 다양하게 동원됐다. 창간 10주년 기념호인 72년 3월호에는 박종화(예술원 회장), 백철(한국펜본부 회장), 김동리(한국문인협회장), 조연현(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 위원장) 등 제도권 문단 지도급 문인들의 축하 메시지를 싣기도 했다.

그러나 72년 말 유신정치가 시작되면서 ‘한양’의 편집 방향은 한국 정부에 대해 비판적 입장으로 바뀌었다. 자체 논조도 장기 집권과 반민주화를 우려하는 쪽으로 기울었고, 한국 내 필진도 반체제 문인들의 글이 자주 실렸다. 이웃 나라에서 발행되는 잡지였지만 한국 정부로서는 눈엣가시가 아닐 수 없었다.

72년 11월 일본에서 열린 국제펜클럽회의에 다수의 한국 문인이 참석해 ‘한양’ 측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았던 일은 정보 당국으로서는 호재로 삼을 만했다. 게다가 그때 이호철이 ‘한양’지 관계자에게서 6·25 직전까지 다녔던 원산중학교 졸업증명서를 받았다는 사실이 포착되면서 정보 당국이 노린 ‘모양새’는 대충 갖춰진 셈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사안을 가지고 ‘문인 간첩단’이라는 거창한 타이틀로 사건화하려 한 시도 자체가 애당초 무리였다. 기소 단계에서 간첩죄를 제외할 수밖에 없었을 뿐만 아니라 소위 ‘혐의’를 입증할 만한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결국 10월 31일의 항소심 공판에서 정을병은 무죄, 다른 네 사람은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모두 풀려나게 되지만 유신정권으로서는 오점으로 남을 만한 사건이었다.

한데 사건이 일단락된 뒤 문단 일각에서 번진 불협화음도 뒷맛을 씁쓸하게 했다.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몇몇 문인이 이호철의 유약함을 탓한 것이다. 당국이 얼기설기 조잡하게 엮은 덫에 이호철이 강건하게 대처하지 못한 탓에 일찍 종결될 수 있었는데도 시간만 끌었고 결국 유죄 판결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런 살벌한 상황에 처했을 때 시종일관 강인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느냐는 여러 문인의 반론도 물론 있었다.

후에 구중서는 그의 평론 가운데서 이호철을 이렇게 변호했다. “…이호철의 사람됨이 상당히 겁이 많은 편이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그 겁 많은 사람이 60년대 이래 모든 박해의 현장에서 도피해 본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연행-투옥-석방-복권으로 이어지는 순환관계는 이제 그의 몸에 너무도 친숙해져 있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문학 평론가로 추리소설도 여럿 냈다. 196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동네에서 생긴 일』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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