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암투병 보고 백신치료제에 관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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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항암백신 개발 기업을 인수한 김상재 대표.

뉴스위크편한 길 놔두고 험한 길 가는 의사 출신 기업인이 있다. 지난해 국내에선 보기 드문 항암백신 원천기술을 보유한 카엘젬백스를 설립한 김상재(44) 대표가 그렇다.

김상재 카엘젬백스 대표 의사 출신 벤처기업가… 항암백신, 줄기세포은행 두 마리 토끼 쫓는다

그는 한때 대학 동기생(한양대 의대)들로부터 “미쳤다”는 핀잔까지 들었다. 의사라는 안정된 직업을 버리고 사업에 뛰어든 까닭이다. 그것도 창업과 폐업을 밥 먹듯 하는 바이오 벤처기업이다. 하지만 요즘은 어떨까?

“병원을 하는 친구들이 오히려 안정된 수입을 가진 나를 부러워한다”고 김 대표가 말했다. 의학도가 바이오 벤처기업을 여럿 설립한 기업인으로 돌아선 과정은 그만큼 극적이었다.

그는 의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세포 생리학을 전공했다. 모교에서 의대 교수가 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모교에는 마땅한 자리가 없었다. 그는 미국에서 새로운 의학을 배워보라는 지도교수의 권유에 따라 1992년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곳에서 척추 신경 의학을 공부했다. 1995년 박사학위(Doctor’s Degree)를 받아 귀국한 그는 서울 압구정동에 개인병원을 차렸다. 그로부터 6~7년간 그는 소아 척추 신경 분야에서 말 그대로 ‘잘나가는’ 의사였다. 후배들도 그의 병원을 찾아와 척추 신경술을 익혀 갔고, 대한소아척추협회 학술이사를 맡아 대외활동도 활발히 했다.

서울 강남, 경기 분당·일산 등지의 초·중학생 2만여 명의 척추 X선 사진을 무료로 찍어 척추곡만증(척추가 휘어지는 증세)의 심각한 실태를 알리기도 했다. 의사로서 이름도 날리고 돈도 벌었던 그에게 운명 같은 일이 벌어졌다. 2002년 가까운 선배가 이름도 생소한 줄기세포에서 신경세포를 만들었다며 그를 찾아왔다.

처음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해 흘려 들었다. “신경세포는 한 번 죽으면 못 만든다고 교과서에도 나와 있거든요. 신경세포는 재생이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어 선배의 말이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았어요.” 하지만 김 대표는 선배가 줄기세포에서 신경세포를 유도해 내는 것을 연구소에서 확인하고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일반화된 기술이지만 그 시절엔 몇 군데에서만 연구하고 시도됐던 신비한 영역이었다”고 그가 돌이켰다. 신경세포의 재생 뉴스는 그의 내면에 잠자던 장사꾼 기질을 깨우는 소식이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줄기세포가 연구 초기단계여서 잠재력이 풍부한 데다 의학전문가들이 뛰어들 만한 분야로 여겨진 것이다.

운영하던 병원을 정리한 그는 2003년 초 선배와 함께 FCB(Future cell bank · 지금은 FCB파미셀로 합쳐짐)라는 줄기세포 추출·보관 회사를 설립했다. 하지만 첫 번째 벤처회사 설립은 참담한 실패였다. 줄기세포에서 신경세포를 만드는 것까진 좋았지만 인체에서 줄기세포를 추출하는 게 너무도 힘겨운 일이었다.

골반 뼈를 뚫어 줄기세포를 추출하는 방식으로 번거롭고 혐오감을 준다는 이유 등으로 시장에서 외면 당했다. 결국 창업 첫 해에 지분만 남긴 채 회사를 넘겨줘야 했다. 하지만 그의 의지가 완전히 꺾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몇몇 동료와 새로운 줄기세포 추출법을 연구했다. 마침내 2년 만에 일반 혈액에서 줄기세포를 추출하는 기술을 찾아냈다.

헌혈을 하는 것처럼 간단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또 다른 역경이 닥쳤다. 2005년 12월 이 기술을 통해 한국줄기세포은행을 설립할 즈음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논문 파동에 휘말리면서 사회 전반이 줄기세포 관련 신기술이라면 색안경을 끼고 보기 시작했다[그는 현재 한국줄기세포은행의 CRO(위험관리책임자)로 있다].

바이오 벤처기업가로서 그가 걸어온 길은 이처럼 구불구불하다. 창업에 뭉칫돈을 쏟아 부었지만 월 100만원도 집에 가져다줄 형편이 안 되던 시절도 몇 년 겪었다. 그렇게 그가 창업을 주도했거나 인수한 벤처기업이 대여섯 개에 이른다. 그러다 보니 전문가들마저 그의 사업 아이템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했다.

바이오 기업 열풍에 편승해 한몫 잡으려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는 연구자이자 경영자인 그가 극복할 과제이기도 하다. 김 대표는 지난해 두 개의 기업을 새로 인수했다. 5월엔 상장기업인 카엘(지금은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났다)이라는 화학용 필터와 활성탄을 공급하는 회사를 사들였다.

반도체 생산 공정에서 발생하는 유해가스 제거용 필터를 만드는 회사다. 또 10월엔 항암백신을 연구하는 노르웨이 기업 젬백스(GemVax)를 약 1000만 달러에 인수해 카엘젬백스라는 한국 회사로 거듭나게 했다. 젬백스는 영국 리버풀 대학이 췌장암, 간암, 폐암 환자들을 대상으로 3상 임상이 진행 중인 항암백신 ‘GV1001’에 대한 원천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이 기술이 한국에 넘어옴으로써 국내 항암백신 개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김 대표는 말했다. 그는 인생의 갈림길에 선 듯하다. 엄청난 돈을 쏟아 부은 항암백신의 성공 여부에 벤처기업인으로서 그의 성패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카엘젬백스는 GV1001의 2임상시험 결과 췌장암 환자의 경우 평균수명이 8.6개월 연장됐다고 밝혔다.

기존 췌장암 항암제(젬시타빈)가 6개월 연장효과를 보이는 것에 비해 2.6개월 수명을 늘렸다는 것이다. 회사 관계자는 최근 전 세계 말기암 환자들에게 ‘시판 전 의약품’을 공급하는 영국 IDIS사와 GV1001 판매 계약을 맺었다고 밝혔다. 김 대표가 GV1001을 개발 중인 젬백스를 인수하게 된 데는 애틋한 사연이 있다.

몇 해 전 간암으로 숨진 그의 모친과 관련한 것이다. 모친은 2003년 초 간암 4기 판정을 받아 오랜 투병생활 끝에 지난해 7월 눈을 감았다. 의사 출신인 그가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을 것은 누구라도 쉬 짐작해 볼 수 있다. 각국의 면역세포 치료제를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녔다. 이렇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을 때 만난 기업이 바로 젬백스였다.

미국 유학 시절 만난 미국의 의료인들이 차세대 세포 치료제를 연구하는 젬백스의 존재를 알려줬다. “기존 간암 항암제가 잘 듣지 않던 어머니의 병세가 몇몇 면역세포 치료제엔 좋은 반응을 보였다”고 그가 말했다. 모친이 숨을 거두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기업이 심각한 자금난을 겪던 젬백스를 김 대표가 인수했다.

“주변에서는 그런 젬백스를 어머니가 주신 선물이라고 한다”고 그가 말했다. GV1001은 2011년께 3상 결과가 나올 예정이다. 그때까지는 이 약의 효능을 둘러싼 관측은 다소 엇갈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치료제의 효능을 우회적으로 가늠해 볼 만한 기회가 있다. 카엘젬백스가 얼마 전 ‘시판 전 의약품’ 공급사인 IDIS를 통해 전 세계 췌장암 환자와 의사에게 GV1001을 공급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IDIS는 임상시험 중이거나 아직 허가되지 않은 의약품을 의사나 환자들이 필요로 할 때 의사 처방전에 따라 지정된 환자에게 직접 판매하는 일종의 의약품 도매상이다. IDIS와의 공급계약은 약효가 어느 정도 인정돼 의사나 환자들의 필요에 의해 이루어질 수도 있고, 제약사 의지에 따라 정식 시판 전에 시장 경험을 쌓거나 일정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체결될 수도 있다.

따라서 “IDIS와 공급계약만으로는 꼭 연구 중인 약의 신뢰도를 더해 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국내 다국적 제약사의 한 관계자는 말했다. “공급계약 이후 매출의 지속여부가 시장 신뢰확보의 시금석”이라고 그가 덧붙였다. 김 대표는 “서류작업이 끝나는 오는 7월부터 IDIS가 전 세계 수요자들로부터 주문을 받게 된다”고 말했다. 기업 경영자로서 그에 대한 성적평가는 이때부터 시작될지도 모른다.

박 성 현 뉴스위크 한국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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