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급 깎을만하면 다깍아 최저생계비도 위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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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97년 11월과 98년 2월. 겨우 석달 차이지만 국제통화기금 (IMF) 관리체제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면 월급봉투 두께가 눈에 띄게 얄팍해졌다.

각 기업들은 직원들의 사기를 고려해 '표' 가 덜 나도록 기본급보다 보너스.활동비.복지비용 등에서 줄이고 있지만 봉급생활자들이 호주머니로 느끼는 체감급여는 결국 마찬가지다.

일부 직장인들은 깎인 월급분을 벌충하기 위해 부업전선에 뛰어드는 경우도 있다.

노조와의 협의가 필요없는 임원과 간부들이 일차적인 감급 (減給) 대상이다 보니 초임 이사가 고참부장보다 월급을 적게 받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 얼마나 깎고 있나 = 대우그룹은 올들어 임원 15%, 과장급 이상 10%를 삭감했다.

쌍용그룹은 임원 30%, 직원에 대해 15% 깎았으며 한진그룹은 과장급 이상 10%, 한일그룹은 5 (사원)~30% (임원) 줄였다.

임원 이상만의 임금을 깎은 기업은 삼성 (10%).고합 (15%) 등. 진로그룹은 임원의 임금을 40%나 삭감했다.

광고.언론계 역시 제조업 못지않게 한파가 심하다.

광고회사와 언론사에서는 10~30%의 임금삭감과 함께 보너스 반납의 행렬이 줄을 잇고 있는 실정이다.

임금삭감은 퇴직금에도 당장 영향을 미친다.

연봉 3천만원의 직장인이 올 1월부터 10% 삭감당할 경우 1월 퇴직자의 퇴직금은 3.3%, 2월과 3월에 퇴직하는 사람은 각각 6.8%, 10%가 줄어든다.

이처럼 늦게 퇴사할수록 퇴직금도 덩달아 많이 삭감되기 때문에 정년이 가까운 직원들은 심각하게 퇴직시기를 따져보는 모습도 늘고 있다.

◇ 보너스.급여외 항목이 주요 삭감대상 = D그룹의 제조업 계열사에 근무하는 4년차 이사 K (48) 씨. IMF 이후 월급은 총액기준 15% 삭감됐다.

3백50만원인 월급은 그대로 받지만 연봉 (6천6백만원선)에서 15%를 자르다 보니 보너스가 연 7백%에서 4백15%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지난해 연말 보너스 지급을 대대적으로 연기했던 30대 그룹들은 올해에도 LG.금호.해태.뉴코아 등 16개 그룹이 1백%에서 많게는 6백~7백%까지 보너스를 삭감할 방침이어서 이제 '보너스는 없다' 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임금을 지난해 수준으로 유지키로 한 기업들도 인건비를 '표 안나게' 깎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연월차 수당을 지급하지 않고 휴가를 보내거나 재고누적을 이유로 명절 때 휴가기간을 늘려 잔업을 없애는 것 등은 이미 고전적인 방법에 속한다.

H그룹 L (34) 대리는 IMF 전후로 1백40여만원에 달하는 월급과 7백%의 상여금을 그대로 받고 있다.

하지만 월급외에 매달 38만원씩 꼬박꼬박 받던 현장 식대비와 15만원씩 받던 유류보조비가 모두 없어져 연간 실질소득이 20.2%나 줄었다.

쌍용.대상.신호.신원그룹 등에서는 월 10만~20만원선인 직원들의 차량보조비를 폐지했으며 SK 등에서는 해외주재원의 수당을 대폭 감축해 나가고 있다.

상여금을 자사 상품권 (코오롱) 이나 주식 (대림.동아) 으로 대신 받는 경우도 있으며, 연장근무가 많은 일부 백화점에서는 경영위기를 이유로 잔업수당 신청을 직원 스스로 자제토록 만들어 실질임금을 줄여나가는 방법을 쓰고 있다.

◇ 중소기업 근로자.자영업자가 더 어렵다 = 대기업 봉급생활자들이 감급으로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중소기업.자영업자.일용근로자 등으로 한파가 번지고 있다.

중소기업 K전자의 5년차 생산직 근로자 金모 (30) 씨는 대기업의 하청 일감이 적어지면서 잔업이 줄어드는 바람에 잔업수당이 없어지고 보너스 (4백%)가 절반으로 줄어드는 등 전체 임금이 24%나 감소했다.

일감이 줄어든 일용직 노무자.목수.미장공 등의 일당도 6만~13만원에서 3만5천~9만원으로 30~40%씩 떨어졌다.

◇ 연봉제 도입이 는다 = 국내 기업들은 과거의 연공서열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연봉제와 능력급제를 앞다퉈 도입하고 있다.

전체 인건비가 줄어듦에 따라 일을 잘하는 사람에게 돈을 더 줌으로써 생산성을 높이자는 것이다.

30대 그룹중 올해안에 연봉제를 실시할 계획인 곳은 15개 그룹에 달한다.

코오롱과 아남그룹이 1월부터 임원급과 차장급에 대해 연봉제를 실시한데 이어 3, 4월부터 삼성 (이사 이상) 과 SK.한진.금호.한화그룹 (부.차장) 이 연봉제를 실시한다.

◇ 부업전선에 뛰어든다 = 모특급호텔 홍보담당직원 (33) 은 친구와 함께 분식점을 내고 퇴근 후 그곳으로 '출근' 하고 있다.

종합상사의 한 중견사원 (40) 은 수입이 줄어들자 회사의 판촉물 제작 일감을 가져다 집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고 있다.

화장품과 건강보조식품 판매회사인 누스킨 관계자는 "지난해엔 물건을 받아 파는 회원 10만여명중 10% 정도가 직장인이었으나 요즘 30%에 이른다" 고 밝혔다.

전업에 대비해 미리 기술을 배워두려는 직장인도 늘고 있다.

수도요리학원 이정임원장은 "요리사 양성 저녁반 학생의 20%정도가 직장인" 이라고 말했다.

경제2부·생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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