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4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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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남다른 의협심을 가졌다는 것 외에는 식견도 천박하고 돌격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박봉환과의 동거가 합의에 이르렀고, 그 내연의 관계를 세 사람 앞에서 공개해버린 것도 동기가 먼 곳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선착장 부근의 뜨내기 선원들에게 술국을 팔아 연명해야 하는 협소한 선술집 한 칸도 혼자된 여자가 오만하게 꾸려나간다는 것이 손쉬운 일은 아니었다.

곳곳에 박힌 암초투성이와 마주쳐야 했다.

바다 속의 암초는 거친 해류와 파도에도 떠내려갈 걱정이 없어 좌초되기도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선착장 선술집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굴러오는 암초를 밀어내는 일도 혼자인 그녀로선 눈물이 쑥 빠질 만치 힘겨울 때가 많았다.

가장 힘겹고 치명적인 천적은, 머리 속에 항상 저속하고 추잡스런 생각으로 들어차 있는 각양각색의 사내들이었다.

잠겨 있는 문을 쇠망치로 거리낌없이 부수고 들어와 야료를 부리는 사내들은 일상으로 경험하는 일이었고, 심지어 승희는 옛날부터 여러번 동침을 한 내 여자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사내들도 한 둘 아니었다.

그래서 영동식당 미닫이문에 매달린 자물쇠는 언제나 쑤셔놓은 벌집처럼 거덜이 나 있었다.

미행과 구애, 협박의 수순을 반복하며 옥죄고 드는 그 폭력들은 분명 범죄인데도 불구하고 범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보편적인 신념체계를 가진 사람으로선 극복하기 어려운 엄청난 장애였고 함정이었다.

세상으로부터 철저하게 노출된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는 허무와 고독과 두려움을 가려주거나 쓰다듬어줄 아무도 그녀에겐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한 몸 의지하고 살아갈 새로운 거처를 찾아나선다는 것도 까마득하고 두렵기만 해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여기나 저기나 사내들이 횡행하지 않는 세상이 있을 리 없었다.

무턱대고 과격하기만 해서 하찮은 일에도 곧잘 주먹 휘두르려 드는 공격적인 남자의 등뒤에 몸을 숨기는 것도 지금 당장 이 선착장에서 살아남는 길이었다.

삶의 본질에 숙연한 태도로 접근하는 서정적 호소력을 갖지 못한 선착장 주변의 폭력 일변도의 시류가 그녀에게 그것을 터득케 한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 그것은 바로 한철규였다.

삶의 열정이 밑바닥까지 식어버린 듯한 그의 울적하고 무기력한 몸짓을 지나칠 수 없었다.

그를 바라보고 있으면, 어쩐 셈인지 바로 그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거나, 자신의 누추한 삶에 대한 질문을 받은 것 같은 쑥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낡고 때묻어서 버려진 것들에 대한 애정과 미련이 그를 바라보고 있으면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듯했다.

그는 평범했지만, 그가 던지는 이미지가 평범하지 않았다.

그의 가시권 안에서 살고 싶은 욕구를 끝내 뿌리칠 수 없었던 승희는 먼저 박봉환부터 부추긴 것이었다.

곧장 어디론가 떠나가버릴 것만 같은 한철규의 발목을 잡아두는 계책으로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그녀는 한철규를 잡아두기 위해 박봉환을 선택하는 모험 속으로 대담하게 뛰어든 것이었다.

그러나 불안한 출발임에는 틀림없었다.

네 사람 모두를 밀가루 반죽하듯 한데 뒤섞고 종일을 두고 버무려보았자, 삶의 결들이 지나치게 이질적이었으므로 종국에 가선 따로따로 놀아날 사람들이란 불안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그 불안이 오히려 유장한 순환의 힘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의외성에 위안을 두기로 하였다.

그녀는 박봉환이 따라준 술잔을 오래도록 들고 있었다.

그러다가 술잔 속으로 떨어진 몇 방울의 눈물과 함께 단숨에 목 안으로 털어 넣었다.

가슴에 차 있던 슬픔의 무게가 독한 소주에 희석되어 배꼽노리 아래로 침전되고 있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독한 술로 말미암은 초토의 기억 속으로, 감정의 기복이 밋밋하게 교체되는 박봉환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구름에 싸인 달을 너는 보았지. 세상은 구름이요 홍도는 달빛. 하늘이 믿으시는 네 사랑에는. 구름을 걷어주는 바람이 분다.

홍도야 우지마라 오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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