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리는 YS정부…사회·사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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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문민정부의 또다른 이름은 '사고공화국' 이었다.

김영삼대통령의 취임식 여운이 채 가시지않은 93년 3월 경부선 구포역에서 무궁화호 열차가 탈선, 78명이 숨졌다.

이는 5년동안 육.해.공에 걸쳐 벌어지는 대형참사의 서막이었다.

같은해 7월 서울을 떠나 목포로 가던 아시아나 여객기가 추락해 66명이 사망했고 10월에는 전남부안군 위도앞바다에서 서해페리호가 침몰해 2백92명이 수장됐다.

이듬해인 94년 10월에는 성수대교가 무너져 32명이 숨졌고 95년 4월에는 대구지하철공사장에서 도시가스가 폭발해 1백1명이 희생됐다.

터졌다하면 수백명이 목숨을 잃는 대형참사가 릴레이식으로 계속돼 "이번에는 어디서…" 하며 가슴졸이던 와중에 95년 6월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건국이래 단일사고로는 최대규모로 시민 5백1명이 숨지고 9백37명이 부상했다.

안전불감증이 빚은 참사였다.

대형사고는 국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97년 8월 대한항공여객기가 괌 상공에서 추락하면서 2백29명이 숨졌다.

개발의 허상이 곳곳에서 드러났고 그 잔해는 처참했다.

한편 부정부패 척결은 문민정부의 과제였던 경제회생과 국가기강확립의 전제조건이었다.

슬롯머신비리로 대표되는 문민사정의 첫 메스에 당시 검찰총장을 꿈꾸던 이건개 대전지검장, 안기부 기조실장을 지낸 엄삼탁 병무청장, 경찰청 천기호치안감 등이 줄줄이 구속됐다.

6공의 '황태자' 였던 박철언씨도 문민사정의 그물을 벗어나지 못했다. 박씨는 '표적수사' 라고 반발했고 이때부터 문민사정에도 '표적사정' 이란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95년 10월19일 민주당 박계동의원이 은행차명계좌를 흔들며 노태우 전대통령이 4천억원대의 비자금을 은닉했다고 폭로했다.

역사바로세우기란 이름으로 진행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에 대한 단죄의 서막이었다.

'성공한 쿠데타' 였던 12.12사건이 군사반란으로 자리매김됐고 5.18광주민주화운동도 새로이 조명되면서 전씨는 항소심.상고심을 거쳐 무기징역, 노씨는 징역17년이 확정됐다.

근대사 최초의 본격 과거청산이자 30여년동안 깊숙이 뿌리내린 군부통치의 잔재를 씻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역사적 단죄도 15대 대통령선거전이 치러지면서 정략적 흥정의 대상이 됐고, 김대중국민회의후보가 당선된 직후 전.노씨는 사면돼 구치소를 나섰다.

다만 광복50주년을 맞아 95년 8월부터 이뤄진 옛 조선총독부의 철거작업만이 역사바로세우기의 초라한 업적으로 남았다.

논란속에 이뤄진 철거작업은 그동안 우리민족의 가슴을 짓눌러왔던 일제의 그림자를 지웠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마저도 다른 한쪽으로부터는 '부수는데나 능한' 정권의 업적이라는 비아냥도 받았다.

문민정부의 마지막 1년은 그나마 지난 4년동안 쌓아왔던 개혁의 밑바탕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렸다.

문민사정의 칼날은 대통령의 아들을 향해 날아왔다.

무려 5조원대의 은행대출을 받고서도 결국 부도처리된 한보의 특혜배후에는 대통령의 측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결국 이처럼 과녁을 맞히지 못한 빗나간 개혁은 IMF체제라는 국가부도위기로 끝을 맺은 것이다.

박종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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