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참! 그사람] 정계 떠난 황산성 변호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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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좀더 겸손했으면 합니다." 정치 활동은 완전히 접었지만, '할 말은 한다'는 기질은 여전해서일까. 황산성(60.여) 변호사.

지난해 TV 법률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했지만 올해부터 대중 앞에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여성의 정치 참여가 늘어나고 나라 안팎이 어지러운 터라 근황이 궁금해 그를 찾았더니 대뜸 대통령에 대한 충고부터 꺼냈다.

지난 6일 서울 구기동의 자택 겸 변호사 사무실에서였다.

"요즘 국민 대부분이 '경제가 안 풀린다'고 하는데도 '내가 있는 한 경제는 산다'는 식으로 나가는 것은…. 위에 오르면 고개를 숙이고 볼 줄 알아야 해요."

황 변호사는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 지지파였다. '노무현을 사랑하는 변호사 모임(노변모)'의 일원이었다. 어려운 시절을 지켜보며 젊은 노 대통령이 개혁을 이끌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었단다.

황 변호사는 "나는 장관 때도 당시 대통령에게 직언과 고언을 했다"며 "지금 하는 말도 대통령이 더 존경받게 하려는 충언으로 들었으면 한다"고 했다.

언론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충고를 던졌다. 대립각을 세우지 말고 언론과 자주 접촉하며 대통령의 생각을 이해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YS 시절의 일화를 소개했다.

"제가 장관할 때, 그러니까 대통령이 되신 초기입니다. 특정 신문사를 자꾸 거론하는데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어요. 안 되겠다 싶어 자제분을 통해 신문사 대표를 만나시라고 권했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서로 오해가 풀렸어요. 노 대통령도 그렇게 언론을 자기 편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대통령을 만나 직접 이런 말씀을 전하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뜻밖의 얘기로 들릴 만한 대목이었다. 그 자신, 언론에 대해 '안 좋은 추억'을 갖고 있으니까. 1993년 환경처 장관 시절, 기자 회견에서 눈물을 보이고 "장관 못 해먹겠다"는 발언을 해(당시 일부 언론 보도) '자질 미달'이라는 언론의 뭇매를 맞았다. 결국 10개월 만에 장관직에서 도중 하차한 것도 언론과의 불편한 관계에서 기인한 바 크다.

"가끔 제 말이 확대 보도될 때면 주변에서 '소송하라'고 했어요. 하지만 제 생각은 달랐습니다. 언론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 고위 공직자를 못마땅한 눈으로 보는 '시대의 잘못'이라 여겼지요."

여성 정치인 돌풍이 불었던 17대 국회의원 선거와 현재 여성 장관들의 활약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봤다.

"세상이 변했죠. 저는 장관 때 공석에서 바지 주머니에 손 넣었다고 욕을 먹었는데, 지금은 여성 장관의 패션이 화제가 될 정도니까. 그만큼 인식이 바뀌어 전보다 여성 고위 공직자가 일하기 쉬워졌겠지만, 그래도 장벽이 많을 거예요. 그들이 더 일을 잘 할 수 있는 여건이 됐으면 합니다."

1999년 뇌출혈로 쓰러진 뒤 건강이 좋지 않아 모든 정치.사회 활동을 접었다고 했다. 그런데 지난 4월 총선 때 한국기독당 비례대표 1번으로 나온 이유가 궁금했다.

"잘 아는 원로 목사님께서 이름 좀 빌려달라고 간청하셔서…. 아이들도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 '그분이 그렇게 간곡히 말씀하시는데 어떻게 거절하느냐'고 했지요. 건강 문제도 있고, 뭐 안 된 게 잘 된 거죠."

로스쿨이나 미국식 배심제 도입 등 사법 개혁에 대해서는 "내 습성으론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건 우리 세대의 뜻일 뿐, 사법 개혁의 방향은 세상을 이끌 젊은 세대가 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달에 한건 꼴로 들어오는 사건을 다루는 것을 제외하면 '집안 돌보기'가 요즘 그의 주업무다. 청소.빨래 등을 직접한다. 당뇨에 혈압이 높아 늘 몸을 움직이는 게 좋기 때문이란다.

마당에서 상추.고추.호박 등 '농사'도 지었다. 하지만 초보 농사꾼을 못 면해 비료를 너무 많이 주는 바람에 야채가 모두 죽어버렸단다. "올해 농사는 텄다"며 활짝 웃는 얼굴에서 여유가 묻어난다.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단순하고 부족할 것 없으며 편안한 은퇴 생활'을 즐기는 황 변호사. 하지만 하나만큼은 아쉬워했다.

"지금 대통령 주변에 자세를 바꿔 보라고 직언할 만한 사람이 있을까요."

글=권혁주.신은진 기자<woongjoo@joongang.co.kr>
사진=최승식 기자 <choiss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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