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숙인 직장인들 새 여행풍속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동해의 어촌마을에서 해뜨기를 기다리는 인파. 높은 전망대는 도시를 내려다보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예전에도 '무료여행' 이라면 한번쯤 눈길을 줬지만 지금은 '반드시 무료여행을 가겠다' 는 열성파들이 늘고 있다.

IMF한파로 지갑이 얄팍해지고 직장에서 피말리는 생존경쟁이 치열해지는 요즘, 새로운 여행집단들이 등장하고 있다.

여행계에서는 이들을 '태양족' . '고공족' . '공짜족' 으로 부른다.

20명이 일하는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김창균 (49) 씨. 김사장은 지난주 가족과 함께 해돋이로 유명한 정동진에 다녀온 태양족이다.

“창업후 작년까지 12년간 설보너스를 꼬박꼬박 지급했지만 올해는 중단했어요. 불황으로 그늘진 우리의 현실이죠. 그래서 일출을 보며 뭔가 희망을 가지자는 생각에서 밤새 차를 몰았습니다.”

서울에서 정동진까지는 자동차로 5시간. 열차로는 8시간. 밤새 목적지를 향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희망찬 상상의 날개를 편다.

짐승의 울음소리는 공장굴뚝에 밀려났지만 아직도 활동하는 야생동물의 소리같기도 하고 낮에 보면 시커먼 냇가도 물속의 돌까지 보이던 예전 맑은 개울로 생각된다는 것. 피곤도 목적지에 도착하면 말끔히 가신다.

동해의 붉은 태양이 눈앞에 떠오르고 겨울의 기운찬 파도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태양족들은 "그래 다시 한번 시작해보는 거야. 아직 힘을 다 쏟은 것은 아니잖아. " 하며 희망을 찾게된다는 것이다.

매주 정동진을 찾는 인파는 1만여명. 이들중 상당수가 밤을 새운 무박파들로 '어둠속 피곤을 감수하며 밝음을 찾는' 사람들이다.

고공족은 태양족과는 다른 이유에서 높은 곳을 찾아다닌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요즘 직장생활이 부쩍 고달프다는 남편의 푸념을 받아주는 손정숙 (35) 씨. 손씨는 휴일에는 딸과 함께 전망대를 찾는다.

“시어머니 수발과 남편 뒷바라지를 하면서 위만 바라보니 목이 아픕니다.

한번이라도 나에게 내려다볼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전망대를 자주 찾게되죠.” 갓 입사한 신참내기 정호진 (27) 씨는 친구들과 남산 하얏트호텔에서 시간을 보낸다.

정씨가 이 호텔에서 시키는 음료는 칵테일 한잔. 정씨 역시 남산밑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직장생활의 스트레스를 푸는 고공족인 것이다.

서울 여의도 63전망대 관계자는 “IMF한파가 시작되기 전인 작년 10월 하루입장객이 2천8백명이었으나 요즘은 3천명이상이 입장하고있다” 고 말했다.

이같은 현상에 대해 고려대 사회학과 김문조 교수는 “태양족과 고공족의 출현은 답답한 일상의 파괴를 통해 스트레스를 풀려는 사회현상으로 판단된다.” 고 분석한다.

김교수는 태양족이 해돋이를 즐기려는 욕구외에 교통비 정도의 저렴한 여행비에 '모래시계' 등 다양한 화제거리가 생기면서 등장한 집단으로 진단했다.

고공족은 폐쇄적인 공간을 벗어나 탁트인 시야를 확보하려는 욕구에서 출발했다는 것. 공짜족은 불황으로 여행갈 여유가 없지만 여행을 가고싶다는 욕구는 그대로 남아 무료여행기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집단이다.

최근 괌관광청이 신혼부부 대상 아이디어공모행사 일환으로 30쌍을 무료로 여행시켜준다고 발표하자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1천여명. 30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캐나다관광청은 5월에 각각 한쌍식의 신혼부부와 실버커플을 무료로 여행시켜준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는데, 경쟁률이 최소 1백대 1에 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라디오.TV방송에서 여행권을 상품으로 내걸고 실시하는 퀴즈등도 '반드시 가겠다' 는 열성파들로 붐빈다.

특히 일부 극성파들은 밤새워 예상문제를 풀면서 여행기회를 잡으려고 혈안이다.

IMF한파로 나타난 새로운 여행풍속도. 경제의 그늘이 벗겨지기를 목마르게 기다리는 우리 여행의 한 단면도다.

송명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