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국사진·증서 첫 발견…한국최초 단증보유자는 윤주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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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조선의 바둑국수 하면 떠오르는 이름이 노사초 (盧史楚) 국수다.

일제시대에 와선 후진들에게 약간 밀렸던지 조남철9단은 “순장바둑은 이석홍 (李錫弘) 선생이 가장 셌고 현대바둑은 윤주병 (尹周炳) 선생이 가장 셌던 것 같다” 고 회고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는 물론 해방이전의 바둑계조차 안개속에 싸여있는 것이 현실이다.

1930년대 말, 윤주병씨등 노국수들이 대국하고 있는 사진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또 윤주병씨가 1939년 일본기원으로부터 받은 한국최초의 '단증' 도 함께 발견됐다.

이 두장의 사진은 尹국수의 장손인 윤창요 (尹昌堯.54) 씨가 보관해온 것이다.

청주의 바둑연구가 이승우 (李承雨) 씨는 "한국인으로 일본기원에서 단증을 처음 받은 사람은 조남철9단이 아니고 윤주병등 3인이며 일제시대에도 순장바둑뿐 아니라 현대바둑도 많이 두어졌다.

따라서 45년부터 시작되는 한국현대바둑사는 기점이 잘못됐다" 고 주장했다.

이 내용이 지난해 11월11일 본지에 보도됐는데 尹씨가 이를 보고 본지에 연락을 해온 것이다.

조남철9단에게 확인한 바에 따르면 사진 한가운데서 바둑을 두고있는 사람이 윤주병국수임에 틀림없다.

그 왼쪽에서 무릎을 세운 채 구경하는 사람은 유진하 (柳鎭河) 국수. 현호실거사란 필명으로 동아일보에 우리나라 최초로 바둑관전기를 썼던 사람이다.

尹국수의 맞은 편에서 바둑을 두고있는 사람은 민중식 (閔仲植) 국수 같은데 확실치는 않다고 한다.

그외의 사람은 趙9단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단증' 사진을 보면 심사위원에 일본최후의 본인방인 슈사이 (秀哉) 명인을 필두로 기타니 미노루 (木谷實) 9단의 스승인 스즈키 다메지로 (鈴木爲次郎) , 조훈현9단의 스승인 세고에 겐사쿠 (懶越憲作) 등 전대의 고수들 이름이 선명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승우씨의 조사에 따르면 이 단증은 아마추어단증에 틀림없다.

이 당시엔 프로.아마 구별도 없고 또 프로의 단증과 글자 하나 다른 것도 없지만 尹국수가 이 단증을 받고 일본기원에 쌀 다섯가마 값인 50원의 납입금을 냈다는 기록이 있다 (1942년 일본기원 최초의 프로기사가 된 조남철씨는 물론 돈을 내지 않았다) .당시 尹국수를 위해 애호가 21명이 73원을 거둬 납입금을 내고 나머지는 경성일보 주최 전조선 소인위기선수권대회에 경성대표로 출전한 尹국수의 경비로 충당했다는 것이다.

소인 (素人) 이란 아마추어를 말한다.

趙9단이나 장손 윤창요씨가 기억하는 尹국수는 주역등 한학에 조예가 깊고 영어.중국어.일어.독어등 5개국어에 능한 '특별한 분' 이었다고 한다.

그는 '오문 (吾文)' 이란 일기체의 글을 남겼는데 여기엔 유럽등 세계정세의 변화 등에 광범위한 식견이 담겨 있었다.

1893년 충남 비인에서 태어나 전북 군산에서 주로 활동한 尹국수는 1957년 작고했다.

趙9단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노국수들을 모두 프로로 인정하고 50년에 한국최초의 승단대회가 열렸지. 그런데 이분들에게 '선생님은 프로기삽니다' 고 하면 '내가 무슨 프로냐' 고 화를 벌컥 내곤 했었어. 바둑이 취미지 무슨 전문이냐 이거지.” 오늘날 승부기계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냉엄해진 프로세계와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얘기다.

박치문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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