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이홍구 칼럼

절실해진 통일외교의 비전과 전략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43면

국제정치·경제의 세력균형과 판도가 송두리째 바뀔 수 있는 오늘의 전환기는 모든 국가를 불안에 몰아넣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 정상적인 경쟁에 참여했다가는 패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가장 비정상적인 공세로 생존의 활로를 찾겠다는 북한의 의도를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19세기, 20세기의 한국이 아니다. 열강의 이익이 뒤얽힌 외교전선에서도 우리 민족의 앞날을 능동적으로 열어갈 수 있는 힘과 의지를 갖춘 대한민국이다. 따라서 세계사의 예외 지대가 되어버린 북한으로 하여금 깊은 고립의 수렁에서 탈피해 함께 아시아공동체 건설에 동참하자는 것이 우리 통일외교의 목표다. 지금까지 북한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저지른 일련의 도발로 악화된 위기는 오히려 통일외교 추진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6자회담의 당사국들이 각자의 이익을 가늠질하고 있는 이때가 바로 우리의 기회다.

미국 오바마 정부는 국제정치세력의 다원화를 수용하고, 대화를 통한 협조로 새 국제질서 창출에 앞장설 것을 내외에 공약하고 출범했다. 군사보다는 외교를 앞세우겠다는 방침이지만 한반도나 아시아에 대한 구체적인 전략이 확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모험적인 강수(强手)로 압박해 양자협상을 강요할 수 있다는 북한의 기도에 미국이 순순히 응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북한의 장래에 대한 책임을 혼자 떠맡을 의도가 전혀 없기에 6자회담, 특히 중국과의 협조를 통한 해결책을 서서히 추구하겠다는 입장이다.

일본은 북한 미사일이 일본 열도 상공을 지날 때마다 ‘평화국가’란 자화상이 한낱 환상이 아닌가 하는 불안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일본의 자존심과 자신감을 자극하는 것은 중국의 부상과 미·중 양대국 체제, 이른바 G2가 자리 잡고 일본은 뒷자리로 밀릴 수 있다는 악몽이다. 그러기에 일본은 미·중·일 3자대화를 추진하는 데 열을 올릴 뿐, 북한 문제 해법을 제시할 여유를 갖지 못하고 있다.

아시아 지역에서 외곽으로 밀린 듯한 러시아의 경우, 미·중·일에 부담을 주는 북한의 ‘스포일러’ 역할이 반드시 싫지만은 않은 분위기다. 그러나 오바마가 제의한 미·러의 전략적 대화가 궤도에 오르면 한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지정학적 입장도 서서히 정리될 것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다자외교 성공의 열쇠는 역시 중국에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정치·경제·군사 등 여러 차원에서 초강대국의 반열에 도달하고 있는 객관적 사실에 더하여, 왕년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중화의 꿈이 합성된 중국의 굴기(<5D1B>起)는 이번 경제위기 속에서 더욱 분명해졌다. 그러한 중국이 초강대국으로서의 위상과 책임을, 특히 스스로 역설하는 아시아공동체의 기수 역할을 어떤 식으로 보여줄지는 국제사회의 초미의 관심사다. 스스로 예외 국가임을 강조하며 독불장군으로 행세하려는 북한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데 과연 어떤 리더십을 제공하느냐 역시 중국의 새로운 위상을 가늠하는 테스트가 될 것이다. 그러기에 통일외교의 당면과제는 중국의 선택이 수반하는 위험과 부담을 6자회담 관계국들이 어떠한 방법으로 분담할 것인가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는 일일 것이다.

한반도의 남과 북은 동상이몽(同床異夢)의 처지에 놓일 때가 적지 않았다. 지금 북은 그들이 둔 강수가 외교적 승리를 위한 전초전이라 생각할 것이다. 반면 우리는 통일외교의 새 장을 여는 기회가 왔다고 믿고 있다. 역사의 진전에는 오묘한 힘이 작용한다. 지금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통일외교의 비전을 가다듬고 전략을 추진해야 할 때다.

이홍구 전 총리·중앙일보 고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