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2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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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걸쭉한 육담을 주고 받는 것 외에, 자신이 이 방에서 여자와 동침하기까지의 동기나 사건의 줄거리가 명료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권커니 작커니 하던 도중에 변씨가 몇 번인가 자리를 뜬 적은 있었지만, 그때마다 곧장 방으로 돌아왔던 것으로 기억되었다.

한철규의 스산한 객고를 달래주기 위해 변씨가 기꺼이 여자를 조달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설만치 친숙한 사이도 아니었고, 자신이 여자를 불러 달라고 다급하게 짓조르고들만치 정욕에 시달림을 받고 있던 처지도 아니었다.

게다가 이 곳은 월정사가 바로 코앞인 한적한 민박촌이었다.

이런 곳에 몸을 파는 여자가 상주하고 있을 건덕지도 없었다.

그런데 미열 (微熱) 이 있는 듯 한 알몸의 여자는 치근덕거리지는 않았지만, 지금 그의 잔허리에 실다리를 바싹 붙이고 누워 있었다.

자신의 등을 쓰다듬고 있던 여자의 손이 이젠 하복부로 내려가고 있었다.

수치심을 느끼면서도, 남자의 참담한 기분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배려가 스며있는 듯한 여자의 손을 뿌리칠 용기는 나지 않았다.

적당한 온기를 지닌 여자의 손놀림은 간결하면서도 매우 능숙했고, 몽환적인 교감이나 친화력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고주망태로 취한 상태에서도 여자와 관계를 가졌었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아닐까. 그러나 그 기억조차 투명하지가 않았다.

필름이 끊어진다는 말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는 불두덩에서 가만히 멈춰있는 여자의 손을 꼭 잡았다.

자극을 줌으로써 여자의 목소리를 이끌어내려는 심산이었다.

예측은 적중했다.

“이제, 정신이 드시나 보죠?”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한철규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러나 여자는 다시 그의 잔허리를 낚아채 이불 속으로 끌어당기면서 핀잔을 주었다.

“바쁘게 갈 곳도 없으면서 왜 자꾸 숭어뜀을 하세요?” 승희였다.

놀랐다기보다 아득한 심정이었다.

이 여자가 어떻게 여기까지 뒤따라 왔으며, 그와 잠자리를 같이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다름아닌 승희라니. 그는 잠에서 깨어난 이후 처음으로 그녀를 힐끗 돌아다 보았다.

두번이나 돌아보았지만 긴 머리결에 반쯤 가려진 그녀의 얼굴은 승희가 틀림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소?” 자신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온 독백이었다.

급전직하의 허탈감과 낭패로 그는 풀썩 배를 깔고 엎드리고 말았다.

“하긴 그렇게 취했으면, 기억도 희미하실만 하죠. 그렇지만, 나중에 따져보시고 지금은 주무세요. 내가 좋아서 달려온 것이니까, 부담이나 죄책감 가질 필요도 없으시구요.” 죄책감이라니. 한 이불 속에서 옷만 벗고 나란히 누워 잠잔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제서야 주문진에서 진고개까지 완행버스로도 1시간 반이면 달려올 수 있는 거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통신망 한 가지는 선진국 뺨칠 정도로 미세하게 발달되어 있는 이 나라에서, 애써 숨어다녀야 하는 도망자가 아니라면, 소재파악이란 식은 죽 앉아서 먹기가 아닌가.

한철규는 비로소 승희에게 물었다.

“변씨는 어디 갔소?” “가긴 어딜 가요. 안 방에서 자고 있을테죠.” “언제 왔소?” “그때가 아마 11시가 넘었을 거예요. 부랴부랴 택시까지 잡아탔죠.” 승희의 손이 그의 앞 가슴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러다가 얼굴을 돌려 그의 목덜미에다 살짝 입을 맞추며 응석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좀 꼭 껴안아 주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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