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이동]10.<끝>영남에선…IMF 사태 겹쳐 "차라리 잘 뽑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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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국민회의 대구시지부 백형삼 (白亨三.36) 민원부장은 요즘 싱글벙글한다.

민원담당이다보니 관공서를 자주 들락거리게 되는 데 공무원들이 이만저만 고분고분해진게 아니란다.

불과 몇달 전만해도 잘 거들떠 보지 않던 그들이었다.

“기분이 아주 야릇합니다.”

그는 달라진 세태가 싫지는 않다면서도 너무 얄팍한 것 같다고 했다.

국민회의 대구시지부에는 요즘 하루 5~6명 정도의 민원인이 찾아온다.

며칠이 지나도 '개미 하나' 찾지 않던 곳이다.

그러나 요즘은 민원 전화받기도 힘들 지경이다.

공무원이 자기 민원을 들고 찾아오는 경우까지 있다.

거꾸로 한나라당 대구시지부. 도무지 찾는 이가 없다.

썰렁하다 못해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조만간 사무실을 줄일 계획이란 관계자의 설명이다.

남는 공간은 세를 주고 전세금을 운영비로 쓸 예정이란다.

이같은 현상은 부산에서도 마찬가지다.

국민회의 부산시지부.경남도지부 관계자들도 요즘 하루가 짧다.

여태껏 전화 한통화 없던 사업하는 친구가 술을 먹자고 매일 전화한다.

명함 한장 주고받은적 밖에 없는 공무원이 하루가 멀다 하고 “별일 없으시냐” 고 전화를 걸어온다.

“정말 좋은 세상 만난 것 같다” 는 그들의 말이 짐작간다.

영남 속의 국민회의 사람들이어서 희소가치 또한 높다.

광주 출신이면서도 10여년전부터 부산에서 장사를 해온 金모씨. 그는 되도록이면 사투리를 쓰지 않으려고 애썼고 어느새 부산사투리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 그가 요즘 전화받을 때면 옛날 사투리가 툭툭 튀어 나온다.

“내고향을 어떻게 알았는지 국민회의쪽에 아는 사람 없느냐고 물어오는 사람들까지 있어요.” 이런 모습을 지켜보는 현지 주민들의 정서는 복잡하다.

특히 대구가 그렇다.

일종의 허탈감에 젖어있는 듯한 분위기다.

대구시민들은 사실 지난 선거에서 어느 선거 때보다도 단합된 힘을 과시했다.

대구시민들의 이회창 (李會昌) 후보 지지율은 72.7%였다.

대구 출신인 노태우 (盧泰愚) 후보가 13대때 획득한 69.8%보다도 높다.

김영삼 (金泳三) 후보의 득표율은 58.8%에 그쳤었다.

그럼에도 간발의 차로 무너지자 매우 당혹해 한다.

선거가 끝난지 두달이 가까워오는데도 모이기만 하면 그 얘기다.

“왜 대구사람들이 이회창을 그렇게 밀었느냐” 고 물어보면 한결같이 “ '다른 사람' 이 될까봐 그랬었다” 고 말한다.

이회창후보가 정말 좋아서 찍었다는 말은 적다.

그만큼 상대당 후보가 싫었다는 얘기다.

선거가 끝나고 근 한달 가량은 TV에 김대중 (金大中) 당선자가 나오면 아예 TV를 꺼버리는 경우조차 있었다.

그러나 요즘 들어서는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대구에서 제일 오래된 K성당. 신부가 미사를 지내면서 “김대중당선자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자” 고 해도 이를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됐다.

술좌석에서도 당선자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대는 경우는 많이 줄어들었다.

간간이 '당선자' 란 호칭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고 그게 대구 정서의 변화를 모두 설명하진 못한다.

대구의 한 회사원 朴모씨는 그같은 변화를 이렇게 설명한다.

“우선은 金당선자가 그런대로 일을 잘해주고 있으니까요. 잘하는데 비아냥거릴 수만은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속마음까지 달라졌다고 봐서는 안됩니다.

아직도 마음 한구석은 삐뚤어져 있어요. 계기만 있으면 언제든 표출될 수도 있는 겁니다.”

한마디로 金당선자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김영삼대통령에 대한 비난의 소리만 높다.

모든 게 金대통령 책임이란 투다.

한발 나아가 PK (부산.경남) 를 싸잡아 비난하기도 한다.

“우리는 힘을 다해 이회창을 밀었는데 PK는 이회창.이인제를 나눠 지지하는 바람에 정권을 놓쳤다” 는 것이다.

그렇다고 부산의 金대통령에 대한 감정이 괜찮다는 얘기는 아니다.

원성은 자자하다.

김홍조 (金洪祚) 옹이 마산에서 봉변을 당했다는 등 밑도 끝도 없는 별의별 소문들이 다 돈다.

국제통화기금 (IMF) 한파까지 겹쳐서인지 金대통령을 옹호하는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남들이 PK 운운하며 싸잡아 손가락질하는 것은 물론 金대통령을 욕하는 데는 못마땅한 표정이 역력한 게 부산 정서다.

김대중당선자에 대해선 그런대로 긍정적 반응이 상대적으로 많다.

“TV에서 국민과의 대화를 봤는데 실물을 잘 알고 있더라. 잘 뽑은 것 같다” “호남 집권으로 지역감정도 해소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 아닌가” 등의 반응이 그것이다.

아직은 마땅히 흠 잡을 게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영남지역의 이처럼 묘한 정서는 영남 특유의 성급함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5년 뒤를 위해 지금부터 뭉치자는 것이다.

벌써부터 학연.혈연을 찾아 이런저런 모임들이 열리고 있다.

보다 현실적인 사람들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자존심을 되찾자고 말한다.

그러나 그게 지나치다 보니 잡음도 많다.

부산의 경우 시장출마 예정자 4, 5명을 둘러싸고 고교동창회가 사분오열 (四分五裂) 돼 있다.

부산의 한 회사원은 영남정서를 이렇게 설명했다.

“허탈감 뒤에는 뭔가 심정적으로 기댈 곳을 찾게 마련이지요.”

부산·대구 = 조용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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