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의 북한 문화유산답사기]5.진파리고분과 평강공주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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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동명왕릉 주위의 산 언덕엔 20여개의 고구려 무덤들이 산재해 있다.

미술사에선 여기를 진파리 (眞坡里) 무덤떼 (古墳群) 라 부른다.

모두 돌칸흙무덤이며 안길 (羨道) 과 안칸 (玄室) 으로 이뤄진 외칸무덤 (單室墓) 이다.

시기적으로는 평양으로 천도한 5세기초부터 6세기에 걸쳐 있다.

그중 진파리 고분의 명성을 드날리게 해준 것은 제1호분과 4호분의 벽화다.

진파리 고분벽화에는 참으로 특이하게도 소나무 그림이 아주 서정적으로 그려져 있다.

특히 제1호분 북쪽 벽에 그려져 있는 한쌍의 소나무는 그 자태가 대단히 어여쁘고 늠름한데 하늘에는 아름다운 인동 (忍冬) 당초가 바람결에 흩날리고 있어 더욱 환상적이다.

한마디로 고구려 고분벽화, 아니 한국미술사에 빛나는 한폭의 명화다.

그래서 진파리 고분을 답사한다는 것은 비록 지금은 밀폐돼 벽화를 볼 수 없다 할지라도 이 명작의 현장에 가 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큰 의의와 기쁨을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내 지금 진파리 언덕에 오르니 진파리 고분벽화에 나오는 소나무처럼 멋진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과연 우연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지금까지 발견된 85개의 고구려 고분벽화 중 유독 진파리 고분에만 소나무 그림이 있는 것을 우연으로 돌리기엔 너무도 인연이 깊어 보인다.

동명왕릉과 진파리 고분을 안내해 준 이는 리명화 강사였다.

강사는 안내원보다 직급이 높다고 하는데 실제로 리명화 강사는 내가 답사길에 만난 10여명의 안내원 중 가장 학식이 깊어 보였다.

나이는 28세에, 세대주 (북한에선 남편을 이렇게 부른다) 는 의사라고 했다.

나는 진파리 솔숲과 한 몸이 되고 싶어 콧바람 소리까지 내며 있는대로 깊이 숨을 들이켜보고, 떨어진 솔잎을 밟는 감촉이 더없이 포근하게 느껴지는 오솔길을 걸으면서 안내 강사의 얘기를 들었다.

옛날에 이 언덕엔 소나무가 더 우거졌는데 고을 관리가 잘못해 산불을 냈다는 것이다.

화가 난 평안감사는 이 관리에게 멀리 제주도까지 가 소나무를 옮겨다 심어놓으라는 벌을 내려 일부러 제주도 소나무를 가져왔다고 한다.

그래서 이쪽 아래쪽 솔밭엔 해송 (海松) 이 가득하다는 설명이다.

그러고 보니 평해 월송정이나 강릉 경포대에서 보던 그런 소나무들이었다.

나는 얘기를 들은 값으로 정겹게 말을 당겨 보았더니 그 대답이 더욱 그윽했다.

"명화동문 그 말을 믿으세요?" "얘기가 재미있고 교육적이지 않습니까? 과학적으로 설명하자면 벌방지대 (저지대) 엔 해송이 잘 된답니다.

" "야! 그 해석이 더욱 멋있습니다.

명화동문 최고가는 강사입니다.

" 내가 이렇게 입바른 칭찬을 하자 안내강사는 순발력 있게 받아친다.

"앞놓고 평가하는 걸 뭐라 못하겠는가.

" 사람 앞에 놓고 칭찬하는 걸 무슨 칭찬인들 못 하겠느냐는 말이다.

북한에 와 내가 놀란 사실 하나는 이곳 여성들의 유머 감각이었다.

농담하는 말재간이 보통이 아니다.

내가 어떤 식으로 농을 던져도 화내거나 앵돌아지는 일 없이 이렇게 여유있게 넘긴다.

안내강사가 스무개의 무덤 중 어느 쪽으로 가고 싶냐고 묻기에 우선 벽화가 그려져 있다는 제4호분으로 먼저 가자고 했다.

멀리 있을 줄 알고 1호보다 4호를 가리켰는데 저 동쪽 끝이 1호분이고 4호분은 요 모서리 돌아 있단다.

아담한 크기의 제4호분은 아침 햇살을 받아 무덤무지가 말갛게 빛나면서 따뜻한 정감마저 느껴졌다.

그런데 제4호분은 놀랍게도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무덤이라고 안내판에 쓰여 있었다.

이 아름다운 벽화무덤이 아름답게 살다간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무덤이라는 것이 반가웠다.

나는 온달 얘기는 시덥지 않은 옛날얘기로만 알고 있다가 시덥지 않은 바보 온달 이야기의 주인공은 온달이 아니라 평강공주라는 호암 문일평 선생의 글을 읽고 큰 감명을 받은 적이 있다.

이 이야기는 바보 남편에 장님 시어머니를 모신 지극한 사랑,끝까지 신의를 지키는 믿음의 사회, 자기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인간적 성실성,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애국심, 그리고 처연히 저 세상으로 떠나는 대범한 죽음의 관념, 거기에다 최고의 지배층과 최하의 평민이 만나는 사회적 일체감을 다른 사람 아닌 평강공주를 통해 나타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구려 사람들은 요즘 영국인이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사모하듯 평강공주를 기렸다는 얘기였다.

그런 생각에 젖어 평강공주 무덤을 좀처럼 떠나지 못하는데 안내강사는 진파리 고분떼 중에서 내부가 공개되고 있는 것은 7호분밖에 없으니 우선 그걸 보러가자며 나를 그쪽으로 안내했다.

아마도 내부에 들어가면 놀랄 것이라며 은근히 기대감을 주기도 했는데, 나는 속으로 '벽화고분이 아닌걸 내가 다 아는데 뭐 놀랄 게 있을라고' 하면서도 뭔가 기대되는 바도 없지 않았다.

왜냐하면 진파리 제7호분은 미술사에서 왕관 장식이 출토된 것으로 유명하다.

이제까지 알려진 유일한 고구려 왕관인 이 금동관은 태양을 상징하는 세발 까마귀 (三足烏) 와 힘있게 뻗친 불꽃무늬를 조각해 남한의 미술사 책에는 '금동투각일상문 (金銅透刻日像文)' 장식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이것을 아주 쉽게 '해뚫음무늬 금동장식' 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7호분은 사방 3.5m의 좁은 안칸으로 짜인 외칸무덤이다.

그러나 안칸에 들어서니 안내강사의 예견대로 놀라운 장면이 벌어졌다.

천장이 시원스럽다 못해 통쾌할 정도로 높이 뚫려 있는 것이었다.

바닥에서부터 무려 6.6m나 됐다.

반듯한 장대석 (長大石) 을 여섯 단으로 좁혀 들어가다가 말각조정 (抹角操井) 법으로 천장을 마무리한 것이다.

그래서 천장은 가운데로 빨려 올라가듯 높고 길게 느껴졌다.

그 구성은 건축학적으로 대단히 견고하게, 미학적으로는 대단히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이 서려 있는 것이었다.

금동관이 나올 만한 귀티가 보였다.

돌들은 이가 꼭 맞게 축조됐고 이음새마다 회를 곱게 칠했다.

솜씨가 훌륭한 것이었을까, 정성이 지극했던 것일까. 나는 넋을 놓고 천장을 바라보며 나갈 줄 모르고 맴을 돌고 있으려니 안내강사는 자신의 임무를 다하려는 듯 해설을 시작한다.

"반듯한 돌로 무덤칸을 쌓고 그 위에 석회를 제창 매끈하게 발라 곱게 마감했습니다.

천장은 여섯 단으로 평행고임을 해 올라가다가 두 단의 삼각고임을 얹어 매우 높게 만들었습니다.

" 참으로 아름다운 미술사 용어였다.

나는 차라리 내가 미술사가를 자처하지 말 것을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여러가지로 안내강사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일었다.

답사를 마치고 돌아갈 때 나는 선물로 준비해온 스타킹 하나를 꺼내 안내강사에게 건네주었다.

"명화동무, 고맙습니다.

이거 별거 아닙니다.

서울서 올 때 스타킹 하나 사왔는데 받아주십시오. " "스타킹이라뇨?" 안내강사는 부끄러운 듯 선물을 받아쥐고 가만히 포장지를 들춰보고는 가볍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 살양말이군요. "

글 = 유홍준 (영남대 교수.박물관장)

사진 = 김형수 (통일문화연구소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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