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2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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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변씨의 집은 건어물 상가를 벗어난 뒤에도 20여분의 비탈길을 더 올라간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었다.

해변마을에선 보기 드물게 바다를 등지고 있는 방 두 칸의 낡은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초라한 누옥 (陋屋) 이었다.

두 사람이 마주 서면, 돌아설 곳도 없어보이는 뜨락을 따라 야트막하게 이어진 블록담 위로 가자미 수십 마리가 할복 (割腹) 을 당한 채로 걸쳐 누워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삐쭘하게 열려 있는 부엌문 사이로, 벽에 걸린 낡은 찬장이 눈에 띄었으나, 오밀조밀하게 배치된 세간살이는 볼 수 없었다.

비닐장판이 깔린 방안에는 재떨이를 대신하는 뚝배기 하나가 놓여 있을 뿐 그 흔한 라디오 한 대 놓여 있지 않았다.

철규를 방에다 앉힌 변씨는 곧장 썰렁한 부엌으로 나가는 눈치였다.

변씨가 식사 초대를 하겠다며, 자기 집까지 안내한 것이었다.

지난 밤은 숙면을 한 것 같은데도 연이은 폭음 탓인지 미지근한 두통이 떠나지 않고 있어 달갑지 않았던 초대이기도 했다.

파리똥이 앉은 천장을 우두망찰하고 있는데,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약속한 대로라면, 지난 새벽에는 박봉환이가 어판장에 모습을 드러낼 차례였다.

그러나 식당을 나설 때까지 그가 돌아왔다는 단서는 어디에도 없었다.

문이 열리고 밥상을 차려 든 변씨가 들어섰다.

사내가 조리해서 끓인 생태국과 밥이었다.

그러나 소반 위에 놓인 소주병을 바라보는 순간, 그는 역한 기운이 울컥 가슴을 치밀었다.

얼른 소주병을 소반 아래로 내려놓고 말았다.

“진절머리가 났던지…, 여편네는 사년 전에 줄행랑을 놔버렸소. 막내놈과 당번을 정해서 번갈아가며 끓여 먹고 사는데, 갯가에서 살기에 굶어 죽지는 않고 그럭저럭 견디고 있소. 여편네는 사팔뜨기여서 거처를 수소문하기로 한다면, 당장 찾아내서 굴신을 못하도록 작신 두들겨 줄 수 있겠지만, 신명풀이를 한들 쌓인 억하심정이 사그라들겠소. 마음을 고쳐먹고 찾아 나서는 일만은 단념하고 말았지만, 대신 술고래란 별호를 차고 말았소.” 그러면서 변씨는 소반 아래 내려놓은 소주병을 냉큼 집어들었다.

그는 소주를 마시고, 철규는 국을 퍼마셨다.

입맛 다시는 소리만 나던 방안에서 낯선 한마디가 들려왔다.

“한선생, 박봉환이 못 만났지요?” “약속 대로라면, 오늘 새벽에 도착해야 할 사람인데 말입니다.” “오늘 새벽에 도착해서 지금 연놈들이 여관에서 발가벗고 나자빠져 빨고 깨물고 꼬집으면서 농탕치며 시시덕거리고 있을 거요. 주문진 어판장 바닥이란 게 늘어지게 펴 봐야 고양이 잔등만 한데, 연놈들이 어딜 간들 내가 모르겠소. 자기 집에 민박 든 사람을 혼자 두고 가랭이나 벌리고 있는 승희가 한선생은 쾌씸하지도 않소?” “두 사람은 비슷한 연배들 아닙니까. 사실이 그렇다 하더라도 모른 척합시다.

시시콜콜 파고들어봤자, 공연한 속앓이만 될 뿐이지요?” 변씨가 성기능 장애자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다독거린 말이었다.

당장 험악한 반격이 있으리라는 예상은 있었다.

그런데 변씨는 이렇다 할 대꾸 한마디 없이 잠자코 있었다.

“한선생이 여기 얼마나 있게 될지는 모르겠소만, 다소 불편한대로 우리 집에서 묵다 가면 안되겠소?

승희 그년, 의리 없는 년이 아닙니까?

내가 그년 괘씸해서 한선생을 우리 집으로 모셔 와 식사 대접이라도 하려는 게요.” “사실은 꽤 오래 머물 것 같습니다.”

“물치리에 눌러 앉으시려오?” “물치리가 조부님의 고향인 건 틀림없지만, 내겐 아무런 연고가 없어요.” “그럼 됐소. 우리 집에서 같이 지냅시다.”

변씨는 집을 나설 때는 철규 혼자였다.영동식당으로 들어서는데, 술청을 혼자 지키고 앉아 있던 박봉환은 제풀에 놀라 화들짝 몸을 일으키며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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