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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수하르토 후계자 지명 화교자금 이탈 가속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인도네시아 통화위기가 IMF와의 협상 타결에도 불구하고 계속되고 있는 것은 한마디로 시장의 불안심리 때문이다.

불안심리는 정치불안과 화교계 자본의 유출 때문에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3월10일 치러질 대선에서 수하르토의 7선 (選) 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대통령은 국회의원.각료 등 1천명으로 구성되는 국민협의회에서 간선 (間選) 으로 선출하는데 이중 5백75명이 수하르토 자신이 지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76세의 고령에다 건강이 나쁜 수하르토의 유고시 후계자가 될 차기 부통령이 주목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수하르토가 20일 "차기 부통령은 과학.기술의 지식이 있는 인물이 적합하다" 고 발언하면서 루피아는 걷잡을 수 없이 폭락하기 시작했다.

자카르타 포스트 등 현지 언론은 이 기준에 맞는 인물이 하비비 과학기술장관이라고 보도했다.

문제는 독일 공학박사 출신의 테크노크라트인 하비비는 군 (軍) 경험이 전혀 없다는 점. 인도네시아는 정치.경제.사회 모든 분야에 군이 깊숙이 관여하도록 제도적으로 보장돼 있어 군부 지지 없이는 통치가 불가능하다.

수하르토는 지금까지 6명의 부통령을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자바 출신 ▶국군사령관이나 정보사령관 (한국의 기무사령관) 경험자를 선택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왔다.

하비비는 또 기획청 장관시절 항공과 조선.방위산업에 수십억 달러를 지출하는 등 경제 실정 (失政) 의 책임자로 지목되고 있다.

이들 프로젝트는 IMF 요구에 따라 모두 무산됐다.

미.일 등이 수하르토가 '부통령 연임 불가' 원칙을 버리고 트리 스토리스노 (62.전 국군총사령관) 부통령을 다시 지명해 주기를 희망하는 것도 정치적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그는 군부 출신에다 선친이 이슬람교 지도자여서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슬람권의 지지도 받고 있다.

수하르토의 가족과 군부도 징검다리 정권승계의 적임자로 그를 지목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화교계 자본의 동향은 현 사태의 추이를 결정짓는 또다른 요인이다.

인도네시아 경제의 70%를 장악하고 있는 화교계 기업들은 현지에서 자금을 대출받아 공장을 짓고 남는 돈을 홍콩.싱가포르쪽으로 유출시켜 왔다.

이들은 비상상황시 몸만 빠져나와도 될만큼 국내외로 위험을 분산시켰으며 유출시킨 금액만 8백억달러에 달한다는 게 자카르타 소식통들의 추산이다.

따라서 화교자본이 달러화를 다시 유입시키지 않으면 루피아 가치의 회복은 바라기 어려운 상황이다.

하지만 수하르토와 정경유착을 통해 사업을 키워온 화교자본가들이 수하르토의 확실한 후계자가 기득권 보장을 공언하지 않는 한 자본을 재반입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도쿄 = 이철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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