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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이동]3.공직사회…"실직걱정은 처음이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50년 묵은 철가방도 이젠 소용없게 됐다."

총무처 고위관리 A씨는 요즘 직원들과 만나면 "갑갑하다" 며 한숨을 내쉰다.

'총무처 불사 (不死)' 전통이 이제 무너질 처지에 있기 때문이다.

48년 정부수립이후 정부내 조직을 이리저리 쪼개고 옮겨도 건재한 기관이 총무처다.

정부조직에 대한 대대적 수술이 있었던 80년 국보위시절에도 살아 남았다.

그런데 이번 조직개편에서는 인사와 조직기능이 사분오열 (四分五裂) 될 상황에 직면해 있다.

이 관리는 "정부부처 살빼기라는 대명제 앞에 별 할말은 없다.

다만 정권교체기속에 누가 자리를 지킬지 모르겠다" 며 불안해 했다.

정부 세종로 청사내 총무처.정무장관실, 그리고 길 건너편의 공보처. 통폐합 대상인 이들 부처에서는 '생존' 과 관련한 갖가지 소문이 퍼져 나온다.

"모 국장은 대통령직인수위의 모 간사와 친하더라. 국민회의 당직자가 누구를 챙겨준다더라. " "대선때 이회창 (李會昌) 후보를 밀었던 모 실장은 김대중 (金大中) 당선자측에 선을 대는 변신에 성공했다고 하더라. " "약삭빠르다" 고 흉을 보는 얼굴엔 부러움과 질시가 섞여 있다.

고위 공직자 X씨는 "내 주제에 아는 사람도 없고 이럴줄 알았으면 대선때 줄타기라도 열심히 해둘 것" 이라고 푸념했다.

그러면서 'IMF시대, 퇴직금으로 성공 창업의 길' 이라는 제목의 신문광고를 뒤졌다.

70년대 공무원이 된 이후 세차례 정권이 바뀐 적은 있었지만 X씨가 '실직' 을 걱정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물론 김영삼 (金泳三) 정권 출범이후의 불쾌한 경험 때문에 변화를 열망하는 분위기도 있다.

김현철 (金賢哲) 씨 인맥.민주계 인사를 비롯한 특정지역 출신이 설친 기억 때문이다.

40대 초반의 한 서기관은 "김대중당선자가 공무원사회의 문제점을 익히 알고 있을 것이므로 뭔가 달라지게 만들 것" 이라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세종로 청사의 모 부처 국장급 B씨. 그의 속은 끓고 있다.

그는 지난해 12월초 주변으로부터 '영전' 될 것이라는 축하인사를 받았다.

장관이 그런 내용의 인사안을 짰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불발에 그쳤다.

야당이 집권하는 바람에 장관이 알아서 인사를 보류한 것이다.

더구나 최근 인수위가 3급이상 공무원 인사를 '임기말 정실이 들어갈 수 있다' 는 이유로 동결토록 지시했다.

그렇다고 B씨는 이런 불만을 내색조차 못한다.

'불경' 스럽다는 구설수가 두려워서다.

고참 공무원 朴모씨는 "인사동결지시는 93년 김영삼정권 등장때는 없었던 일이다.

홍사덕 (洪思德) 정무장관이 인수위가 국보위같다는 말이 실감난다" 고 씁쓰레해한다.

과천청사내 재경원은 정권교체의 한파가 더욱 매섭다.

경제실정 청문회로 '누가 출국금지 대상이더라' '어느 국은 몽땅 조사대상이다' 는 등의 얘기로 뒤숭숭하다.

그런 속에서도 한쪽에선 생존을 위한 자기변호의 소리도 나온다.

모 국장은 "나는 책임질 요직에 들어가보지 못했다.

물러날 사람이 물러나야지 유탄 (流彈) 을 맞을 수는 없다" 고 이를 꽉 다물었다.

한 과장은 "경제파탄과 관련있는 모 인사가 고급 경제정보를 비대위에 넘겨 후한 점수를 얻었다고 하더라" 고 비아냥댔지만 부러워하는 기색은 역력했다.

과천청사 주변에선 고급정보와 충성맹세로 당선자측을 구워 삶는 사람들이 '생활력있는 관리' 로 꼽힌다.

각 부처는 새 집권세력과 지연.학연.혈연이 있는 국과장.직원들을 분류, 차출해 특수 임무를 주고 있다.국민회의.자민련.비상대책위.정부조직개편심의위.비상경제대책위의 멤버들과 인연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지난 16일 국회에서 열린 정부조직개편 공청회에서 이들은 자기부처를 위해 사활을 건 로비를 폈다.

모 부처의 호남출신 Z씨. "공청회 현장에서 고교 선배를 만났다.

선배도 그의 부처에서 나처럼 한직만 돈 찬밥신세였는데. 이젠 남들이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아 거북스럽다."

하지만 싫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그런 줄대기에 앞서 있는 부처중의 하나가 내무부라는게 공직사회의 자체평가다.

관료특유의 노련한 생존술이 있는데다 전통적으로 호남인맥이 상대적으로 강한 부처기 때문. 반면 외무부는 야당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인지 당선자측과 변변한 창구가 없다.

"그러니 당선자측이 외무부를 어떻게 재편할지 전혀 알 수가 없지요. 대선후 특정지역출신 과장 1명을 당선자측에 대외 의전업무 지원임무를 주어 파견했어요. " 모 국장의 설명이다.

총리실의 경우는 줄대기의 양상이 약간 다르다.

김종필 (金鍾泌) 자민련명예총재가 총리로 오는게 기정사실로 돼 있기 때문이다.

관계자들은 국민회의쪽보다 자민련의 세력 분포도를 가져다 진입할 명단을 따져보고 있다.

오병상.최상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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