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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면목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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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면목이 없습니다. 실망시켜 드려 죄송합니다.” 어제 아침 검찰행 버스에 오르기 전, 노무현 전 대통령은 국민에게 이렇게 사과했다. 100만 달러의 부인 권양숙 여사는 남편의 등 뒤에서 눈물을 흘렸다. 전직 대통령은 치욕과 실망의 길을 달렸고 포토라인에 섰다. 5년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책임졌던 전직 국가원수는 검사 앞에 앉아 신문(訊問)을 받았다. 국민은 전직 대통령의 그런 검찰 소환 드라마가 전두환 때 종영(終映)된 줄로만 알았다. 연속극은 14년 만에 이어졌고 국민의 배신감은 한강보다 깊고 크다.

노 전 대통령이 봉하마을을 나설 때 수십 명의 측근, 전직 비서실 멤버와 각료들이 배웅했다. 이들은 손을 흔들었고 버스는 이들에게서 멀어져 갔다. 버스는 노 전 대통령만을 태웠다. 그러나 역사적인 책임으로 보면 ‘노무현 사람들’도 같이 버스를 타야 했는지 모른다. 노무현의 추락은 노무현 패밀리만의 추락이 아니라 노무현 그룹의 추락이기 때문이다.

노 정권의 비리 넝쿨에는 대통령 가족뿐 아니라 측근·부하도 많이 엉켜 있다. 시작은 노무현 변호사의 사무장 출신인 최도술 총무비서관이었다. 이때부터 비서실장·민정수석 같은 청와대 참모, 유시민·이광재·안희정·서갑원·이강철 같은 측근들이 정신을 차렸어야 했다. 주변 관리에 관해 대통령에게 직언도 하고 정권 내부에 경고음을 울려야 했다. 그런 것이 참여정부가 그토록 주창하던 동지 의식이요, ‘도구’ 의식이며, 집단적 책임 의식이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였다. 민정수석은 대통령 친인척과 박연차 같은 위험인물을 감시하는 자리인데 자신이 1억원어치 상품권을 받았다. 대통령의 친구인 총무비서관은 국고 12억여원을 횡령했다고 한다. 어떤 비서실장은 몇 달 전 강금원 회장과 사돈을 맺으면서 골프장에서 요란한 결혼식을 갖기도 했다. 주례는 노 전 대통령이었다. 일부 측근은 각개 행진으로 박연차의 거미줄로 걸어 들어갔다. 노무현의 정치 스승이라는 어떤 원로도 검찰에 소환됐다. 노무현 사람들이 집단으로 이루고자 했던 꿈은 어디로 갔나. 비리뿐만 아니다. 5년 동안 나라의 정체성은 크게 흔들리고, 이념갈등은 더 심해졌고, 있는 자와 없는 자는 더 갈라졌다. 어쩌면 그 실정(失政)의 무게가 비리보다 더 클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