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1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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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구레나룻의 표정이 갑자기 심각해졌다.

국물을 떠먹던 수젓질을 딱 멈춘 채 가슴 속의 상념을 가다듬고 있던 그는 말했다.

"그 여우 같은 년이 정말 그런 내막을 알아채 버렸나? 그런 눈치는 없었는데? 어쨌든 그물 걷고 들어와서 다시 봅시다.

한선생을 믿고 갔다 올테니 혼자 들어가서 승희를 범접하는 불상사가 있어선 안됩니다.

알아듣겠지요?" 염치불고하고 바다로 끌고 나가려던 처음의 작정을 금방 고쳐 가진 것이 틀림없었다.

그를 선착장으로 내보낸 뒤 영동식당으로 돌아와 보니, 식당 역시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대여섯을 헤아리는 어부들이 술청으로 몰려들어 선 채로 해장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이 나간 뒤, 선착장은 시끌벅적해졌고 식당은 조용해졌다.

그녀는 조리대에서 설거지를 하면서, 고개를 숙인 채 난로를 끼고 앉은 철규에게 물었다.

"변씨하고 같이 나가는 걸 보고 바다로 같이 나간 줄 알았어요. " "그 사람이 변씹니까?" "한선생님도 잠 못 주무셨지요?" "잠은 벌충하면 되겠지만, 나를 선착장까지 끌고 나가선 혼자 있을 동안 승희를 범접하지 말라고 간곡히 타이릅디다.

" 담배를 피워 물며 난로가로 다가 앉는 그녀의 기색엔 동요나 수치심 따위를 발견할 수 없었다.

오히려 어떤 연민이 스쳐 지난 것 같았다.

밝은 불빛 아래에서도 짙은 어둠의 그림자가 깃들여 있는 듯한 그녀의 얼굴을 철규는 빤히 바라보았다.

오만하게 보이는 검은 눈동자에는 고독에 시달리는 한 여인의 황량한 심연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었다.

삶의 본질과 맞부딪쳐 있는 듯한 숙연함도 느낄 수 있어서 서울 여자라던 그녀의 가슴 속에 숨겨진 과거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야무지다는 인상은 아니었지만, 희고 갸름한 얼굴은 그녀가 막되고 상스럽게만 살아 오지 않았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었다.

알고 보면, 변씨도 불쌍한 사람이죠 하고 그녀는 허두를 떼었다.

"술좌석에 앉으면 좌중의 분위기를 휘어 잡으려고 억지를 부리는 것도, 어울리지도 않는 턱수염을 기르고 있는 것도, 선착장에선 자기만한 변강쇠는 없다고 떠벌리는 것도 모두가 자기의 어두운 그림자를 숨기려는 허세에 불과해요. 고향은 이곳이지만, 수년 전에 서울로 가서 공사판을 전전하며 살 때 성병을 얻었는데,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결국은 성기능을 온전히 잃어버렸답니다.

마누라도 진작 도망가고 지금은 고등학교 다니는 막내아들과 같이 살고 있다고 해요. 선착장에 살붙이고 살고 있는 사람들치고 변씨가 그렇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그런데 변씨 혼자만 남들이 죄다 알고 있는 자기의 비밀을 모르는 눈치예요. 모두가 변씨 앞에선 쉬쉬하고 있는 탓이지만, 슬픈 착각이지요. 상식적으로도 눈만 떴다 하면, 술을 그렇게 퍼마시는 사람치고 변강쇠가 있을 수 없지요. " "자기가 생각하는 경쟁자들 명단에는 박길동이도 들어 있습디다."

"그뿐만 아니랍니다.

이 식당에 두 번이상 드나든 사람치고 변씨의 명단에 안들어 있는 사람은 없어요. 우습죠?" "영업에 지장이 있겠는데,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지장이 없을 턱이 없지요. 하지만 나한텐 여기가 객지가 아닙니까. 뾰족한 방법이 없었어요. 하지만 선착장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내 속끓는 사정을 알아채고 은근히 동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럭저럭 견디고 있는 셈이지요. " 왜 서울을 버리고 주문진까지 흘러와 살고 있을까. 묻고 싶은 순간, 그는 아차했다.

자신의 처지부터 설명되었을 때, 그런 질문이 가능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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