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보선은 여당 무덤이라지만 … 한나라 패인은 ‘내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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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분석내전(內戰)은 한나라당과 민주당 모두에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그 상처의 폭과 깊이는 한나라당 쪽이 훨씬 컸다. 국회의원 재선거가 치러진 5곳 중 단 한 곳도 이기지 못했다. 악몽 같은 0대 5 패배였다.

29일 저녁 한나라당 여의도 당사 2층에 마련된 4·29 재·보선 상황실에서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오른쪽에서 둘째)가 침통한 표정으로 투표 결과를 받아보고 있다. 왼쪽부터 안경률 사무총장, 박순자 최고위원, 허태열 최고위원, 박 대표와 이윤성 국회부의장. [뉴시스]

선거 전문가들 사이에서 재·보선은 ‘여당의 무덤’으로 불린다. 기록이 말해준다. 2000년 이후 38곳에서 치러진 국회의원 재·보선에서 여당이 이긴 건 단 두 곳뿐이다. 김대중 정부 때인 2002년 8·8 재·보선에서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이 호남의 광주 북갑과 군산에서 이긴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열린우리당은 2005년 이후 기초의원 선거까지 포함해 40전 40패를 기록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디오피니언의 안부근 소장은 “재·보선에선 여당의 고삐를 좀 조여야겠다는 견제심리, 균형심리가 강하게 작용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나라당의 참패를 이런 일반론만으로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불과 1년 전 18대 총선 때 승리했던 수도권과 영남권 모두에서 외면당했기 때문이다.

안 소장은 “여야의 집안 싸움 속에서도 유권자들은 나름대로 순서를 매겨 심판을 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선거를 최선보다는 차선을 선택하는 행위라고 봤을 때 미움의 순서가 선거 결과에 담겨 있다는 의미다. 정권 교체 뒤 여권이 보여온 정치 행태에 대해 박근혜 전 대표보다는 주류 쪽에 더 책임이 있다고 판정했다는 거다. 선거전의 이슈가 정권 심판론은 아니었지만 이명박 대통령 입장에선 부담스러운 성적표를 받았다.

여권 내부엔 선거 패배를 둘러싼 후폭풍이 예고되고 있다. 한나라당의 수도권 재선 의원은 “경주에 중립적 인물을 공천했다면 질 수 없는 선거였다”며 “박근혜 전 대표가 부평 지원유세에 나설 여지를 차단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책임론이 지도부 교체론으로 확산될 것이라고 보는 의견은 아직 적다. 대안 부재론이 이유다. 친박 진영에선 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반이나 남은 상황에서 당 운영의 전면에 나서기엔 이르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 주류인 친이 진영도 아직 주도권 다툼을 벌일 때는 아니라고 보고 있다. 변수는 수도권 소장파 의원들이 제기할 내부 쇄신 주장의 강도와 전염의 속도다.


4·29 재·보선이 민주당에 던진 숙제도 만만찮다. 여야 대결을 펼친 인천 부평을에서 승리했지만 당의 지지 기반인 전주 2곳에서 정동영-신건의 무소속 연대에 패했기 때문이다. 정세균 대표로선 지도력을 의심받은 셈이다. 손학규·김근태·한명숙 등 연합군의 도움으로 부평을을 건졌지만 정 대표 입장에서 이 연합군이 따온 승리의 잔이 어느 순간에 독배(毒盃)가 될 수도 있다. 당장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이 선거 기간 중에 공약한 당 조기 복귀론을 어떻게 방어할지도 고민거리다. 결과적으로 유권자들은 이번에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의 주류 정치 세력에 옐로카드를 꺼내들어 보였다. 그만큼 여의도 정치의 유동성은 커졌다.

승패를 떠나 이번 재·보선이 한국 정치에 남긴 그림자가 있다. 선수인 후보보다 박희태·이상득·박근혜·정몽준(이상 한나라당), 정세균·손학규 (이상 민주당) 등 감독과 응원단이 지배한 선거였기 때문이다. 이들의 그림자 때문에 선거판은 이상 열기에 휩싸였다. 경주 투표율(53.8%)은 지난해 총선(51.9%)보다 높았다. 정치 소비자인 유권자들은 ‘내 이익을 믿고 맡길’ 후보보다는 그 후보 뒤에 어른거리는 거물들의 그림자를 선택하도록 강요받았을 수 있다.

박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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