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진단 10대 한국병]5.경직적 노동시장(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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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대부분의 다른 나라에서는 임금은 노사간에 단체교섭을 통해 결정되지만 고용은 기업이 거의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고용조정도 노사간에 교섭 또는 협의를 해야 하며, 특히 정리해고의 경우에는 엄격한 법적 제약까지 받아야 한다.

요컨대 우리 노동시장은 심한 경직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이같은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해소해야 한다.

기업에게 고용조정의 길을 폭넓게 열어 줘야 한다.

정리해고제 적용 요건을 크게 완화시켜야 하고, 근로시간 조정과 배치전환도 탄력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다만 기업이 고용조정 권한을 갖되 함부로 행사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노동조합이 동맹파업 권한을 갖되 그 권한을 함부로 행사해서는 안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와 함께 구조조정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실업문제에 대한 효율적인 대책 마련도 서둘러야 할 것이다.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시장경제체제를 채택하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시장경제체제하에서는 모든 상품의 가격과 거래량이 시장에서의 자유경쟁을 통해서 결정되는 것이 원칙이다.

노동이라는 상품도 예외가 아니다.

임금과 고용량은 노동시장에서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원칙이다.

즉 개별기업들은 각각 주어진 시장임금하에서 고용량을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어야 하고, 개별 근로자들도 마찬가지로 각자 자기가 원하는 일자리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상대적으로 약자인 근로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게 됐고, 그 합법성이 인정됨에 따라 노동시장에는 여러가지 인위적인 제약이 가해지게 됐다.

구체적으로 기업은 이제 임금이나 고용량을 조정할 때 노조와 교섭 내지 협의를 해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법적인 제약까지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나라에서는 노사간에 비교적 공정한 경기의 규칙이 지켜지고 있다.

즉 임금조정은 노사간에 단체교섭을 통해 결정되지만, 고용조정은 대체로 기업의 결정에 맡겨 두고 있는 것이다.

다시말해 기업의 두 다리중 임금조정이라는 다리는 단체교섭이라는 쇠고랑에 묶여 있는 셈이지만, 고용조정이라는 다리는 비교적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풀어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국내 기업의 두 다리중 하나가 묶여 있다는 사실은 그만큼 노동시장이 경직적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시장경제체제의 원칙에 어긋난다.

그러나 근로자들이 경제적으로 약자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것은 오히려 공정한 경기의 규칙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노사간의 세력균형의 원칙을 하나의 정당한 사회제도로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이 원칙을 노동시장 경직성의 정도를 판단하는 현실적 기준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노동조합이 있는 기업의 임금조정은 노사간에 단체교섭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이 점은 다른 나라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기업이 고용조정을 할 수 있는 길까지도 몹시 제한되어 있다는 점이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는 사람을 함부로 해고하지 못하는 관행을 가지고 있다.

더우기 요즘에 와서는 기업이 경영상의 필요에 의한 해고 (정리해고) 를 하려고 할 경우에도 노조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힐 뿐 아니라 법적으로도 엄격한 제약을 받게 돼있다.

그뿐 아니라 기업 내부에서 근로자들을 재배치하거나 근로시간을 조정하려고 할 경우에도 노조의 간섭이나 법적 제약을 받게 된다.

또한 근로자파견제는 청소.경비등 극히 제한된 일부 직종을 제외하고는 아예 불법화돼 있으며, 유급 생리휴가등 여성의 고용을 실질적으로 저해하는 법적인 과보호 조항들이 있다.

이처럼 경직적인 노동시장 아래서는 국제경쟁력 강화는 말할 것도 없고 노사관계의 건전한 발전도 기대할 수 없다.

대부분의 다른 나라에서는 노조가 예컨대 무리한 임금인상을 고집할 때 기업은 고용조정이라는 무기로 강력하게 대응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이런 무기가 거의 무력화돼 있기 때문에 노사간의 세력관계에서 기업은 일방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수년 동안의 노사관계 동향을 뒤돌아보면 기업이 노조에게 일방적으로 밀려 왔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 노동시장은 또한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이중적 구조에서 오는 경직성과 비효율성도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대기업은 대부분 상당한 시장지배력을 확보하고 있고, 또한 대기업 노조의 대부분은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

따라서 대기업 노조는 번번이 과도한 임금인상을 요구하고, 해당 대기업은 이런 요구를 큰 저항없이 받아들인 후 그 부담의 상당부분을 중소협력업체나 일반 소비자에게 떠넘기게 된다.

반면 중소기업은 가중되는 경영압박 때문에 지불능력이 부족하여 대기업만큼 임금을 올릴 수 없게 되고, 따라서 인력을 유지.확보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요컨대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일종의 불공정거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임금격차는 계속 확대되고, 대기업에는 인력이 남아도는 가운데 중소기업은 인력난을 겪어야 하는 노동시장의 경직성과 비효율성이 생기게 된다.

노동시장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반드시 해결해야할 과제는 실업문제다.

지금 우리나라는 IMF와의 합의에 따라 구조조정을 매우 빠른 속도로 추진해야 한다.

그것도 엄격한 저성장과 통화.재정긴축을 유지하면서 추진할 수 밖에 없다.

앞으로 실업자가 급격하게 증가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명백하다.

실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향의 노력이 필요하다.

사전에 실업자의 발생을 예방하는 것과 실업자를 사후적으로 지원하는 것이다.

실업을 예방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노사 당사자들이 서로 양보하고 설득시키면서 추진해 나가야 한다.

구체적으로 기업은 감원과 같은 극단적인 방법은 가급적 피하고, 노조와 긴밀한 협조하에 근로시간 조정이나 재훈련.재배치와 같은 방법을 택함으로써 근로자들을 포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미 근로자들은 임금동결이나 삭감까지도 받아들일 각오가 돼있는 것으로 보인다.

감원바람이 불면 근로자들은 사기가 떨어지고 이것은 다시 생산성 하락으로 이어지겠지만, 요즘같은 상황에서 고용을 보장해 주면 근로자들은 강한 책임감과 자신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할 것이다.

한편 노조와 근로자들은 고용안정을 최대의 목표로 삼고 임금이나 근로시간.배치전환등에서 상당한 양보를 해야 한다.

이를위해 특히 대기업 노조의 선도적 역할이 요구된다.

이들은 지금까지 임금을 인상하는데 선도적 역할을 해왔지만 이제 고용안정이 최대의 과제로 떠오른 상황에서는 임금을 동결 내지 삭감하는데에도 앞장서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 한때 미국의 자동차 경기가 심한 침체에 빠졌을 때 노조가 앞장서서 이른바 '양보교섭' 을 들고 나왔다는 사실과 독일의 폭스바겐에서 노사합의로 직무분할제 (work sharing) 를 실시했다는 사실은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노사 당사자들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실업 예방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더욱이 앞으로 금융기관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산업분야에 걸쳐서 기업의 도산과 인수.합병이 늘어날 전망이어서 대규모 정리해고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따라서 실업자를 사후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시급히 마련해야 할 터인데, IMF와의 합의에 따라 통화와 재정을 모두 긴축적으로 운영해야 하는 정부로서도 별다른 대책을 내놓기가 어려울 것이다.

결국 기존의 고용보험제도에 크게 의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고용보험제도는 단순히 실업급여 지급뿐 아니라 실업예방.재취업촉진.고용확대등을 지원하는 고용안전사업과 사내직업훈련.재취직훈련등을 지원하는 직업능력 개발사업도 함께 하도록 돼있다.

다시 말해 실업자에 대한 사후적 지원뿐 아니라 사전에 실업을 예방하기 위한 일도 함께 하도록 돼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제도를 좀 더 확대.강화시켜서 활용한다면 실업문제 해결에 상당히 도움이 될 것이다.

다만 이를위해 상당한 규모의 기금이 필요할 것인만큼 이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특별한 대책이 있어야 할 것이다.

<대표집필 = 김대모 중앙대 경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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