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보균의 세상 탐사] 노무현의 ‘권력 이너서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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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호 02면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권력 핵심이 아니었다. 그는 ‘노의 남자’라고 으스댔다. 하지만 권력 실세 그룹에 끼지 못했다. 조기숙 전 청와대 홍보수석은 권력의 언저리에 몸을 걸친 정도였다. 박연차 게이트는 노 정권의 내부 서열·비선(秘線) 구조를 그렇게 드러냈다.

두 사람은 나팔수 그룹에 있었다. 그 시절 여론 관리 패턴은 비슷했다. 정권 핵심부에서 표적을 만든다. 그러면 유·조씨 그룹은 잡설 같은 자극적 용어를 골라내 설쳐댔다. 노 정권의 부패에 대해 “생계형 범죄”(조 전 수석), “검찰수사는 졸렬한 모욕 주기”라는 표현은 그런 행태의 반복이다. 그 언행은 충성의 나팔수임을 자임하는 표시다. 권력 상실로 인한 금단현상의 표출이기도 하다.

노무현 권력은 자기류의 질서를 가졌다. 정권창업 기여도, 인연, 돈거래, 이념적 동질감을 배합해 서열을 매겼다.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은 “내가 대통령 최측근이며 군기반장”이라고 주장했다. 강 회장이 돈으로 관리하는 대상은 386 실세들이었다.

‘안희정· 이광재’ 좌우 인맥이 그랬다. 문재인(전 비서실장)· 이호철(전 민정수석)의 부산파는 핵심임이 거듭 확인됐다. 노건평씨의 봉화대군 패밀리는 은밀한 실속파였다.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정상문 전 총무비서관은 여기에 속했다. 이들 실세의 권력 지분은 90%다. 나머지 10%가 당·시민단체·교수·언론인에 할당됐다.

노 전 대통령은 국정 어젠다를 실천에 옮기는 사람을 밀어줬다. 유 전 장관도 그런 경우다. 그는 대통령 측근이다. 하지만 핵심 이너서클에 들어가지 못했다. 진입 장벽은 높았다. 그만큼 폐쇄적이었다. 조 전 수석은 측근 티를 내면서 호가호위(狐假虎威)한 케이스다.

노 정권 2년 차에 인사의 틀이 바뀌었다. 청와대 문희상 비서실장·유인태 정무수석은 당으로 돌아갔다. 노 전 대통령은 그들을 부담스러워했다. 두 사람은 386 친노(親盧)를 견제했다. 그 무렵 정치 스승이라는 김원기 국회의장의 발언권도 약화됐다. 코드, 유유상종, 회전문 인사가 판을 치기 시작했다.

코드 인사는 내부 규율을 헝클어뜨린다. 친노 그룹은 도덕적 우월감을 가졌다. 여기에 정실주의가 스며들었다. 그 감정은 배타적 특권 의식으로 악성 변종했다. 그들은 박· 강 회장한테 받은 돈을 이너서클의 내부 거래로 생각했다. 부패가 아닌 의리 주고받기, 정치 장학금으로 여겼다.

친인척 감시도 소홀해졌다. 건평씨는 동생 노 전 대통령의 젊은 시절부터 궂은 일을 돌보았다. 집도 사주고 정치 자금도 마련해줬다. 그는 양녕대군으로 자신을 생각했다고 한다. 봉하대군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건평씨를 형님으로 모신 장관들도 있었다. 그는 김대중 정권 때 권노갑씨 정도로 자신의 역할을 설정하기도 했다. 세무공무원 출신다운 치밀함도 있었다. 건평씨는 박 회장이 받은 사업 특혜의 대가를 빠뜨리지 않고 챙겼다.

권력은 갈등과 음해를 동반한다. 박·강 회장의 사이는 나빴다. 강 회장은 “돈으로 권력을 산 브로커”라고 박 회장을 비아냥댔다. 이에 박 회장은 “돈 좀 뿌렸다고 나발 불고 다닌다”고 강 회장을 성토했다고 한다. 박 회장은 노 정권 때 사업을 확장했다. 반면 강 회장은 돈 쓰는 맛을 즐겼다. 돈 쓰는 최고의 재미는 정치 실세들이 돈 앞에 굽실댈 때다. 노 전 대통령은 정권 초기엔 박 회장을 경계했다. 형의 청탁(박 회장 사돈의 국세청장 기용)을 거절한 것도 그 때문이라는 것이다.

노무현 권력의 어설픔, 부패, 패거리 의식이 실감나게 노출됐다. 인사 실패가 주요 원인이다. 사람을 좁게 쓰고, 잘못 쓰면 국정은 헝클어진다. 부패가 뒤따른다. 무능한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절대권력만 절대 부패하는 것이 아니다. ‘노무현과 그 사람들’의 배반과 탈선이 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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