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석 칼럼] 글로벌 불교와 한국 불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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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지적 호기심이나 이국취미의 공간이 아니라 엄연한 수행의 중심축이다. 그들 삶에 뿌리내렸다는 증거다. 『불교, 이웃종교로 읽다』의 저자인 종교학자 오강남에 따르면, 서구 불자는 600만 명. 이민자를 제외한 백인 불자만 100만여 명이다. 놀라운 것은 자부심이다. 자기네 불교를 신불교(New Buddhism) 혹은 엘리트불교라고 한다.

원조인 우리를 종족불교·세습 불교라며 선을 긋는 것이다. 왜 그럴까? 향 피우고 연등 달거나 습관적으로 사찰 다니는 전통불교와 달리 첫째도 수행, 둘째도 수행을 앞세우는 혁신의 노력이다. “아시아 문화의 외양을 벗고 부처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운동”(297쪽)인데, 이쯤 되면 유럽 발(發) 불교개혁 움직임이라고 해야 할까? 그게 지난 100여 년 사이의 변화다.

1893년 열렸던 세계종교회의가 시작인데, 직후 하버드대 등에서 불교 연구 붐이 일었다. 대중화의 첫 물꼬는 1950년대. 문인 긴즈버그·케루악이 붐을 이끌고, 일본 스즈키 다이세츠가 선불교를 강력하게 밀었다. 훗날 한국의 숭산 스님의 활동도 그런 분위기를 탔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렇게 형성된 신자들은 불교애호가였던 쇼펜하우어·니체에서 헤세·소로우·에머슨·휘트먼 등 철학자·문인과는 다르다. 더도 덜도 아닌 어엿한 불자요, 수행자다.

그들은 티벳불교·선불교의 구분을 떠난 통(通)불교를 이끌며 책도 열심히 펴낸다. 내가 읽은 불교 책에 영어 번역본이 많았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에드워드 콘즈의 『한글세대를 위한 불교』가 특출했다. 오경웅의 『선의 황금시대』, 트룽파의 『마음공부』, 틱낫한의 『화』등도 얼마나 훌륭한가! 필자 일부가 아시아 출신이지만, 서구의 지적 풍토에서 재해석된 불교 소식이라서 참신하다. 합리주의 세례를 받은 우리 입맛에도 잘 맞는다.

‘글로벌 불교’의 문이 활짝 열린 것일까? 다음주 초파일(5월2일), 부처님의 자비와 사랑도 동서양 구분이 없을 듯하다. 걱정스러운 건 우리다. 1000여 년 전통을 자랑하고 템플스테이·선식(禪食)정도를 말하지만 제대로 된 불교문화 상품을 창출했다는 말은 못 들어봤다. 수행이 시들하고 내부 혁신도 없는 불교 내부가 역시 문제다. 한국불교, 어떻게 변해야 할까? 다음주 강원도 춘천의 사찰인 현지사를 중심으로 그걸 가늠해보자.

조우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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