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분장과 허세의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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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선거기간중 후보들이 토론회나 연설회에 나설 때는 분장을 했고 또 부드러운 인상을 주기 위해 미소를 많이 지었다.

선거 막바지에 국제통화기금 (IMF) 바람이 불자 선거참모들은 후보의 미소가 분위기에 맞지 않는다고 '웃음의 절제' 를 건의했다.

그래서 후보들은 미소를 덜 짓고 심각한 표정을 많이 지었다.

선거와 상관없이 우리 사회엔 분장과 미소가 너무 넘쳐 있었다.

거품경제라는 말이 있지만 거품이 어디 경제에만 있었는가.

정치와 문화.사회생활, 그리고 우리들의 사고 (思考)에까지 분장과 허세가 충만했다.

눈에 띄게 미소를 절제한 후보는 김대중 (金大中) 후보였다.

당선후에도 기쁘고 좋아하는 표정보다 심각한 표정이 더 많이 비춰졌다.

좋은 세월 다 지나서 떠맡게 된 어려운 짐을 실감한 듯했다.

그런 나머지 그를 지지하지 않은 60% 유권자의 뜻을 헤아려 존중하겠다는 말을 아직껏 듣지 못해 아쉽긴 하지만 경제의 어려움이 생각보다 심각해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말은 그 아쉬움을 덜어주고 있다.

당선자측이 빈번히 축하파티나 열고 경제문제가 아닌 얘기… 인사가 어떻고, 누구를 손보고… 하는 얘기만 나온다면 60%가 아닌 40%에서도 허망함을 느끼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되뇌고 싶지도 않은 얘기지만 현 대통령은 취임때 청와대로 이사하면서 상도동 자택에는 못 하나도 새로 박지 않고 퇴임후 돌아오겠다고 했다.

그런 말 때문에 그의 개혁정책에 기대를 건 사람이 많았지만 개혁은 허사가 됐고, 상도동집은 크게 단장되고 있다.

이제 막 스타트 라인에 설 새 정부에 국민들의 시선뿐만 아니라 세계의 시선이 쏠릴 것이다.

못 하나 새로 박지 않겠다는 분가루 같은 약속, 거창한 구호를 내세우는 허세는 없었으면 좋겠다.

우리 정치의 병리 (病理)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에 패거리짓기가 있다.

당당한 논리의 동조를 위한 힘의 결집이 아니라 스스로 실력이 달리고 지각이 떨어지기 때문에 패거리를 지어 허세를 부리려는 것이 패거리짓기다.

지역감정을 부추긴 패거리, 과거의 인연을 꿰맞춘 패거리를 만들어 실존 이상의 힘을 발휘하려다 보면 명분없는 일도 저지르게 마련이다.

새 집권세력은 패거리로 비춰지지 않을지를 스스로 연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 패거리성을 분장으로 넘기려 하지 말고 그 극복을 위해 진지한 노력을 해야 한다.

앞으로 60% 유권자의 입에서 "그럴줄 알았어" 라는 말이 나오게 되면 그것은 새 정권의 불행이고 한국정치의 비극이기 때문이다.

새 정치에서의 신야당도 허세의 패거리성을 경계해야 한다.

한나라당의 어느 간부모임에서는 당의 단결을 확인.과시하기 위해 새 정부의 첫 총리 임명동의때 이를 거부하자는 논의가 있었다고 한다.

단결의 확인과 과시는 무엇인가.

그런 방식 아니고는 확인되지 않는 단결이라면 이는 패거리적 단결밖에 안되는 것이며 그 과시는 바로 허세부리기밖에 안될 것이다.

야당은 총리임명에 동의할 수도 있고 반대할 수도 있지만 선거에 패배한 지 한달도 안되는 지금, 총리가 지명되자면 두달도 더 남은 지금 그런 논의를 한다면 그것은 당당하지 못하다.

그런 발상은 '영원한 패자' 의 발상이며 패거리정치의 발상이다.

투견 (鬪犬)에서 물어뜯겨 쫓겨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케이오 (KO) 패이고 '으르렁' 소리를 내면 싸우기 전이라도 판정패가 된다.

실력으로 싸우지 않고 으르렁 허세를 부리는 것은 당당하지 못하다는 판정이다.

국제사회는 투견만큼이나 냉혹하다.

나라의 존립과 발전을 위해 저마다 국가경영의 전략을 짜고 경쟁력을 키우는 데 필사적이다.

한국은 열한번째 부국 (富國) 이라고…,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회원국이라고 허세를 부릴 때 이미 판정패의 운명에 섰던 것은 아닐까. 우리를 패배자로 보는 국제사회의 냉소에서 빨리 탈출하기 위해 우선 우리 정치의 분장, 우리 사고의 허세를 과감히 떨쳐버려야 한다.

김동익 <전 본사대표>

◇ 필자 약력

▷33년생

▷서울대 법대 졸.하버드대 니먼 펠로

▷중앙일보 편집국장.주필.대표이사

▷정무1장관

▷건국대 초빙교수

▷한.러문화진흥협회이사장

▷저서 : '정오의 기자' '권력과 저널리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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