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로 짚은 97]미술계…'정체성' 논쟁속 자숙의 한 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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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지난 11월22일 서울 잠실 롯데호텔. 하루 종일 계속된 세미나가 끝날 즈음 청중석에서 돌출한 질문 하나가 장내를 갑자기 어색하게 만들었다.

“이런 행사를 하면서 왜 광주사람은 빼놓은 것입니까. 무슨 저의가 있는 것은 아닙니까. ” 경원대 조형연구소가 개최한 '국제 미술이벤트, 그 검증과 전망' 이란 주제의 세미나장이었다.

단상에는 세계미술평론가 협회장 킴 레빈, 독일 카셀미술관장 르네 블럭, 제1회 광주 비엔날레 전시 총감독 이용우씨가 초대됐다.

올해 세계 여러 곳에서 열린 국제적 미술행사를 놓고 그 성격을 토론하는 자리였다.

돌연히 썰렁한 질문을 던진 사람은 이번 광주 비엔날레의 전시 기획실장인 이영철씨. 그는 이자리에 공식초대받지 못했다.

제2회 광주 비엔날레는 개막 이후 이용우씨의 전시평이 계기가 돼 아이덴티티 (정체성)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전시로서 볼거리는 많았지만 '광주 비엔날레가 여타 비엔날레나 국제적인 미술이벤트와 무엇이 다르냐' 는 지적이 제기되며 아이덴티티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 논쟁이 신문에서 시작돼 시사잡지.미술잡지로 지면을 옮겨가며 폐막때까지 계속됐다.

그 과정에서 양측은 감정이 상했고 그것이 이날 세미나장에서 볼멘 소리로 터져나온 것이었다.

논쟁이 거칠어지면서 미술계에서는 비판과 반론의 형식을 빌려 미술계 헤게모니 장악을 위해 설전을 벌인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있었다.

하지만 광주에서 열린 비엔날레가 광주의 컬러, 한국적 모습을 갖춰야 한다는 지적에는 많은 미술인들이 공감했다.

광주의 아이덴티티 논쟁 외에도 올 한해 미술계에는 유난히 '나는 누구인가' '미술이란 대체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과 자성이 돋보인 한해였다.

빠르게 변화하는 산업사회속에서 파편화 되어가는 인간의식을 감당해야하는 작가들은 실은 몇년전부터 '내가 누구인가' 라는 물음을 지속적으로 물어왔다.

금호미술관에서는 올여름 그 점을 놓치지 않고 '텍스트로서의 육체' 란 타이틀을 내걸고 젊은 작가들이 느끼는 정체성 문제를 짚어본 전시회를 열어 관심을 끌었다.

또 김형관.정보영.이광호씨등 서양화 작업을 하는 젊은 작가들이 '회화의 매력은 어디에 있는가' 라며 회화의 본질을 되묻는 작업을 펼친 것도 정체성문제와 관련해 빼놓을수 없는 대목이다.

이같은 현상에 대해 일부에서는 사회의 보수적 경향이나 불황과 관련지어 해석하기도 했다.

80년대 사회를 향해 현실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던 미술이 근래 설치미술과 테크놀로지 아트의 유행을 거쳐 자기반성적이며 내면적인 작업으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으로 본 때문이다.

더욱이 내년부터 본격적인 IMF 불황시대가 시작되면 자신을 되돌아보는 작가가 늘어날 것이란 점에서 금년에 제기된 정체성 문제는 이후에도 한동안 유효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윤철규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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