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줄 막힌 중기 … ‘풀뿌리 금융’ 육성이 해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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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 경기도 화성에서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김모(55) 사장은 1년에 한 번꼴로 은행 지점에 들러 회사 현황을 브리핑한다. 길면 2년, 짧으면 1년 만에 지점장이나 대출 담당자가 교체되는 까닭이다. 물론 매출 감소 등 회사 경영에 변화가 생기면 수시로 이를 은행에 보고한다. 김 사장은 “회사 사정을 제대로 알 만하면 담당자가 바뀌어 버린다”며 “재무제표에 나타나지 않은 현황을 알리려면 이런 식으로 은행과 자주 접촉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강원도 강릉의 중부새마을금고에선 5명으로 구성된 대출심의위원회가 1000만원 이상 대출을 결정한다. 부결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본점을 포함한 4개 점포의 직원이 지역 상인들의 상황을 훤히 꿰고 있다. 위원회는 이 같은 현장의 판단을 최대한 존중한다. 정호범 이사장은 “10년 이상 한 지점에서만 근무한 직원이 수두룩하다”며 “상환이 가능한 대출인지 아닌지는 담당 직원이 누구보다 잘 안다”고 말했다.

대형 은행 중심의 중소기업 금융지원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은행은 본점의 결정을 획일적으로 적용하다 보니 각 지역에 뿌리박고 있는 중소기업에 대한 맞춤형 지원을 해주기가 어렵다. 따라서 지역 사정에 밝은 지역 금융회사들의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대안으로 오랜 거래 관계와 현장 방문으로 얻은 정보를 토대로 대출을 해주는 ‘관계형 금융(Relationship Banking)’이 부각되고 있다. 종전과 같은 행정지도식 중소기업 지원의 판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관계형 금융이 정착한 일본·독일에선 작지만 강한 지역 금융회사들이 많다. 이른바 ‘풀뿌리 금융회사’들이다. 강성원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독일이나 일본에 작지만 강한 중소기업이 많은 것은 관계형 금융에 밝은 지역금융회사들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라며 “지역금융회사들의 중소기업 지원을 담당할 수 있도록 정책적 지원이 절실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반대 방향이다. 외환위기 이후 대동·경기·동남 등 지방은행이 퇴출되거나 합병되면서 지방은행은 현재 6개에 불과하다.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 은행권 여신의 15%에 불과하다. 1997년 말 231개였던 저축은행은 올 2월 말 기준으로 105개로 줄었다. 같은 기간 새마을 금고는 44%, 신협은 40%가 감소했다.

이들의 빈자리는 전국적 지점망을 갖춘 대형 은행들이 메웠다. 그러나 지역의 금융 수요와 은행의 자금 공급 사이엔 눈높이가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은행에 돈이 모자라 못 주는 게 아니라, 은행과 기업 사이에 돈을 주고받을 채널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소기업중앙회와 중소기업연구원이 지난 2월 전국 152개 중소기업을 방문 조사한 결과, 39%가 은행에 대출 신청을 했다가 퇴짜를 맞았다고 밝혔다. 지난해 10월 이후 정부가 중기 대출을 늘리라고 했는데도 그렇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18개 은행 가운데 중기 대출 의무비율(시중은행 여신의 45%, 지방은행 60%)을 지키지 못한 은행이 6개나 된다. 가계대출이 막히자 2006년 이후 중기 대출을 마구 늘려 놓고선 비가 오자(금융위기), 우산을 빼앗는(대출 회수) 것도 은행을 통한 중기 지원의 한계다. 홍순영 중소기업연구원 부원장은 “중소기업 대출의 90% 이상을 대형 은행이 담당하고 있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며 “제대로 된 중소기업을 선별해 집중 지원을 하려면 기업 사정에 정통한 지역금융회사를 양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준현 기자, 이코노미스트=김태윤 기자

※상세한 기사는 이코노미스트 최신 호(4월 13일자)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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