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사가 쓰는 성칼럼] 배우자 울리는 '유리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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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내가 너의 손을 잡으려 해도 잡을 수가 없었네/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나를 슬프게 하였네~'.

암울했던 1980년대에 유행했던 ‘유리벽’이란 노래의 도입부다. 많은 사람이 서글픈 노랫말에 사랑의 아픔을 표현한 것이라 여기지만, 사실은 정치적 이슈를 우회적으로 표현했던 노래다.

그런데 남녀 사이의 사랑과 성을 다루는 필자에게 이 ‘유리벽’이란 노래의 가사는 또 다른 의미로도 가슴 깊이 와 닿는다. 자신을 둘러싼 ‘유리벽’을 느끼지 못한 채 아무리 상대가 ‘손을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불행을 안고 사는 부부가 제법 많기 때문이다.

S씨 부부는 지독한 섹스리스로 '무늬만 부부'다. 내성적인 S씨는 아내가 특별히 볶는 성격이 아닌데도 자신의 감정을 절대 공유하려 들지 않는다. 회사 스트레스도 좀처럼 표현하지 않고, 스스로 돈 버는 기계인 듯 여긴다. 게다가 섹스는 아내를 위한 의무라 여기니 중노동에 가깝다. 남편에게 감정을 공유하자는 아내의 하소연은 통할 리 없다. 남들 보기엔 성실하고 흠잡을 데 없는 남편이라 왠 사치스러운 불평이냐 하겠지만, S씨를 둘러싼 엄청난 유리벽에 아내는 하루하루 망부석이 되고 있다.

반대로 T씨 부부는 아내의 유리벽이 문제다. 소녀 같은 외모에 긴 생머리의 매력이 물씬한 아내를 둔 T씨는 빛 좋은 개살구. 공주처럼 자란 아내는 미혼 시절 자신에게 구애를 하는 수많은 남성에게 항상 둘러싸여 있었다. 숱한 연적을 물리친 T씨의 승리감은 잠깐, 아내와의 결혼이 무리수였다는 것을 신혼 때 절감했다.

아내는 남편과의 친밀관계보다는 많은 사람의 이목과 인기에만 신경 쓴다. 심지어 친구일 뿐이라며 다른 남자들을 만나다 늦게 들어오기 일쑤고, 이를 탓하면 심각한 의처증으로 몰아세운다. 시선을 사로잡는 무기이니 아내의 외모 가꾸기는 끝없고 요즘은 성형 중독에 빠져 있다. 애를 가지면 달라질까 싶어 임신을 권했지만, 아내에겐 엄마가 된다는 것이 '소름 돋는 일'일 뿐이다. 평생 '소녀시대'를 꿈꾸는 아내는 성생활마저 기피한다.

S씨나 T씨의 아내는 배우자와 친밀감을 형성하는 데 성격상 문제가 있는 경우다. 좀 더 심각하면 정신과적으로 성격장애에 해당된다. T씨의 아내와 같은 연극성 성격장애, 정서적 불안정이 심각한 경계선 성격장애 등도 부부 사이에 친밀관계를 갖기 어렵고 성생활도 힘들다.

심각한 성격장애가 아니더라도 폐쇄성이나 내성적인 성격이 부부 사이를 가로막는 경우는 많다. 강제성이 개입된 탓에 부부관계를 피하는 부부도 있다. 즉, 부모의 일방적인 혼인 요구에 따른 결혼이나 결혼 후 부모의 개입이 심한 경우, 분노 감정으로 부모나 배우자의 부모를 상대와 동일시하면 유리벽을 만들게 된다.

인간관계 중 성관계야말로 가장 강렬한 형태다. 성관계만큼 ‘사랑’이란 강한 정서반응에 육체적으로 가까운 인간관계는 없다. 부부 사이가 안정적이지 못한 사람은 심신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게 옳다. 만약 멀쩡한 신체에 섹스리스라면 자신이나 상대방을 둘러싼 유리벽이 원인일 수 있다.

부부 사이는 도저히 합쳐질 수 없는 겉으로만 투명한 유리 구슬이 만나는 게 아니다. 절반쯤은 겹칠 수 있는 두 개의 비눗방울이 만나는 것과 같다. 자신과 상대의 장단점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 말고 어느 정도 교집합을 만들어 박자를 맞출 수 있는지 노력해 보고 그래도 쉽지 않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게 옳다.

강동우ㆍ백혜경 성의학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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