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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와 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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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외교는 협상의 예술이다. 협상이 예술적이려면 반드시 정확하고도 폭넓은 정보의 수집과 이용이 전제된다. 그렇지 않으면 정보력에서 밀려 삐걱거리고 원하는 목표도 상실한다. 협상은 평화의 원칙이 관철될 때에는 큰 문제가 없다. 하지만 배타적 민족주의나 강경파들이 득세해 전쟁을 상정할 때에는 문제가 달라진다.

오스트리아의 왕세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암살된 것은 1914년 6월 28일이었다. 당시는 게르만 민족주의와 슬라브 민족주의 간의 충돌 기운이 전 유럽을 휩쓸던 때라 이 사건은 자연스럽게 슬라브와 게르만 간의 전쟁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전쟁을 막기 위한 외교적 노력 또한 만만치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유럽의 족보외교를 동원했던 독일의 카이저였다. 그러나 당시 극성을 부리던 민족주의는 4촌 간인 차르와 카이저의 족보외교보다 더 강력해 유럽은 제1차 세계대전에 빠져들고 만다. 이른바 독일의 전략가들이 주장하던 튜톤-슬라브 간 전쟁의 필연성이 현실에 관철된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일부 전략가들은 당시에 시대적 흐름을 정확하게 읽고 이를 다양한 형태의 국가 간 이익과 중화시키는 협상력을 가진 훌륭한 외교관들이 있었다면 전쟁은 없었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제1차 세계대전 후 각국은 외교 및 정보조직의 대대적 개편을 시도한다. 물론 이는 전차.잠수함 등 전쟁무기와 기동력의 발달에 따른 대응 측면도 있지만 시대에 맞는 조직개편과 논리훈련이 따르지 못하면 국가가 낙후될 수 있다는 절박감에서 나온 것이었다. 당시 조직개편에 성공한 영국 등은 다시 선진국이 됐다. 이런 조직개편은 볼셰비키 러시아에서도 시도됐다. 나의 종국적 임무는 '외무부의 문을 닫는 것'이라는 트로츠키의 사상에 빠져들었던 볼셰비키들은 국가와 계급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선 유능한 외교관과 조직이 필수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새로운 양성 기관을 만든다. 그리고 이들은 70년 동안 사회주의 이익을 위해 자본주의 외교관들과 치열한 논리와 정보게임을 벌였다. 최근 우리의 정보.외교조직도 냉전 종식 후의 상황에 맞게 개편돼야 한다는 논쟁이 뜨겁다. 당연한 말이다. 그리고 그 개편은 국가 백년대계를 생각하는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것이어야 한다.

김석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