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 세상보기]돈을 꿔올 사람은 많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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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3당 대선후보가 출사표를 내자마자 경제 파국의 책임 소재를 두고 공방을 벌였다.

일을 그르친 것은 아버지 대통령이니 아들 (이인제) 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

그러자 직위와 재산을 물려받은 양아들 (이회창) 의 책임이 더 크다는 응수가 나왔다.

그런가하면 20억원 플러스 알파를 받은 정경유착자 (김대중) 도 책임대열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나 책임질 사람이 밝혀진들 그 사람들이 돈을 꿔올 수 있을까. 지금 문제의 핵심은 외환위기, 매일 결제가 돌아오는 외국빚과 외상 물건값을 갚을 달러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러자고 국제통화기금 (IMF)에 구제금융도 신청하고, 경제신탁통치마저 받아들이겠다는 것 아닌가.

그렇다.

당장의 경제파국을 모면하는 열쇠는 그 무슨 '책임자' 가 아니라 달러를 빌려오는 사람의 손아귀에 달려 있다.

신임 경제부총리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애를 쓴다만 돈을 마련할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는 것을 왜 모를까. 너무 안쓰러워 그 명단을 적어 보겠다.

1.순외채 (純外債) 를 좋아하는 현사 (賢士) 들 4백억~5백억달러 선에서 맴돌던 외채규모가 삽시간에 1천억달러를 넘어선 것은 95~96년 여름께였다.

갑자기 늘어난 외채 가운데 1년 미만의 단기채가 절반을 넘는다는 불길한 소식이 들린 것도 그때였다.

그러자 이 현사들이 나서서 우리가 외국에 깔아 놓은 채무도 많다고 말했다.

우리가 갚아야 할 빚에서 우리가 받아내야 할 빚을 제하면 순외채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니 걱정말라고 했다.

그러니 텅 빈 외환 금고를 채우는 방법은 이 현사들을 외국에 보내 우리가 깔아 놓은 빚을 받아내는 수밖에 없다.

현사들이여, IMF가 칼자루를 내려치기 전에 어서 가서 우리 빚을 받아 오거라. 어디 순외채 덕 좀 보자. 그대들이 빚을 받아 올 때까지 그대들을 태운 배는 태평양 (아니 대서양?

) 을 맴돌리라. 2.멕시코 차별론자 모든 경제지표가 95년에 외환위기를 겪은 멕시코와 비슷해지는데도 이 사람들은 굳이 우리는 멕시코와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실로 96년과 97년은 멕시코와 닮았느니, 안 닮았느니로 서로 얼굴을 붉힌 한해였다.

멕시코와 닮았다는 것은 멕시코와 똑같다는 말이 아니고 추세가 비슷하게 간다는 함의 (含意) .그런데도 이들은 우리와 멕시코는 코가 다르고 눈이 다르고, 그들은 콧수염이 있지만 우리는 없다고 주장했다.

어떤 차별론자는 그들은 데킬라를 마시지만 우리는 소주를 마신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거울아, 거울아, 멕시코와 우리 둘중 누가 더 예쁘냐. " "한국이 더 예뻐요. " "그건 왜?" "한국은 멕시코보다 경제기초가 강하다잖아요. 어서 국제금융시장에 가서 우리는 멕시코보다 강하니까 5백억달러가 아니고 1천억달러쯤 달라고 하셔요. " 3.한눈 판 사람들 96년의 국제수지 적자가 2백37억달러라는 사상 최대 규모에 이르렀다고 발표됐을 때 (97년 2월) , 아니 그 조짐이 나타났을 때 (96년 한해 내내) '그들은' 한눈을 팔지 말았어야 했다.

한눈 팔지 말라는 경고가 나왔는데도 그들은 그것을 무시했다.

그들이 한눈을 판 구경거리는? 칠룡 (七龍) 의 유희, 합종과 연횡, 몸통과 깃털, 황장엽 리스트, 체중과 병역, 여론조사, 부도유예협약, 돈 감추기와 돈 찾기, 아! 그리고 월드컵과 붉은 악마들. 한눈 판 대가를 치르느라고 지금 그들은 빚을 얻으러 나간다.

그러며 처량하게 중얼거린다.

"살다 보면 한눈 팔 때도 있다.

구렁에만 빠지지 말아다오. "

김성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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