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세기말,최후의 기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지도자의 선택이 나라의 흥망을 좌우한다는 속담이 실감나는 세기말이다.

한국병을 고쳐 신한국을 만들겠다는 공약으로 집권한 YS가 5년만에 국가부도를 냈다.

국제통화기금 (IMF) 의 구제금융을 받아 부도를 면했으나 경제신탁통치라는 치욕을 당했다.

선진국클럽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에 가입해 샴페인을 터뜨린지 11개월만의 일이다.

한국은 선진국 문턱에서 좌절할지도 모르는 세기말 최악의 위기에 빠졌다.

그러나 위기를 잘 극복하면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

현 상황으로는 19세기말의 비극을 21세기에 반복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한말 지도자들은 전제군주제와 봉건사회라는 구체제를 고수했다가 나라를 잃는 국치 (國恥) 를 당했다.

구체제의 해체 (解體) 라는 현실진단과 대책이 없었기 때문에 자초한 국권 상실이었다.

이 때문에 우리는 20세기 전반을 구질서보다 못한 식민지를 경험했다.

그후 1세기만에 우리는 최악의 위기와 마주쳤다.

이번에 새 질서 수립에 실패한다면 21세기 재도약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군정시대에 '한강의 기적' 을 낳아 한국경제모델 창출에 성공했다.

이 모델은 군정시대가 종식됨으로써 시효가 소진됐다.

제3세계의 '선망의 적' 이었던 이 모델은 6월 시민항쟁후 해체기에 접어들었다.

개발독재로 불린 이 모델의 해체는 낡은 자본주의에서 선진형 신자본주의에로의 이행을 의미했다.

여기에 21세기 재도약의 열쇠가 있었다.

국민이 YS정부에 부과한 임무는 구질서에서 신질서로의 전환을 위한 기반구축이었다.

그러나 YS개혁은 실패해 구질서 속에 녹아버렸다.

대선정국 속에서 지금 구정치질서의 붕괴음이 울린다.

군정세력대 반 (反) 군정세력이라는 대립구도가 무너졌다.

3당합당 이전상태로 돌아간 듯하지만 구질서 해체과정의 진통이다.

한나라당은 군정세력과 민주계 및 민주당으로 재편성됐다.

야권도 국민회의가 군정세력이 중심인 자민련과 연합했다.

민주계의 일부는 국민신당이 됐다.

이러한 합종연횡은 구정치질서 해체과정의 이합집산이며, 대선후 정치빅뱅을 예고한다.

새 질서의 싹은 보이지 않지만 방향은 보인다.

대기업을 먹이사슬로 하는 지역주의적 보스정당의 정경유착 구조가 구질서의 본질이다.

새 질서는 전문가와 시민이 참여해 국민의사를 대변하는 과학적 정책정당 구조다.

산업사회는 자유와 합리주의, 그리고 과학정신이 지배하는 시민공동체며, 여기에 효율적으로 대응하는 정치질서는 과학적 정책정당 구조다.

보스와 지역정서가 아니라 정당의 플랜과 가치관을 기본잣대로 투표하는 '정당투표양식' 이 새 정치의 본질이다.

이것은 또 사류정치의 종식을 가져온다.

사류정치에서 일류국가가 나올 수 없다.

"정치 안정 없이 경제사회 안정은 없다" 고 한 콜 독일총리의 철학은 일류정치만이 일류국가를 만든다는 진리를 말한다.

그래서 국가부도는 YS정부의 무능과 사류정치가 만든 합작이라는 것이다.

한보사태와 김현철 비리사건 등이 신호를 보냈음에도 한은특융 등 뒤늦은 개발독재식 대응으로 최악의 위기를 불렀다.

구자본주의 해체의 종점이라는 이 신호를 정치가 보았다면 위기는 피할 수 있었다.

사류정치가 위기를 인식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낡은 우리 경제는 IMF의 해부대에서 수술을 받게 된 것이다.

'정치무능이 국민을 바보로 만든다' 는 정치이론은 사류정치의 국가적 횡액을 설명한다.

낡은 정치의 위기불감증이 한국을 국제무대의 바보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토크빌이 "화산이 폭발하는데 정치가 잠만 잔다.

여러분, 땅이 요동치는 굉음을 듣지 못하느냐" 고 질타한 19세기의 에피소드에 알맞은 우리 정치의 현주소다.

국회가 금융관계법을 유보한 것은 정치가 화산 위에서 잠잔 격이다.

지도자가 위기의식이 없었기에 나라를 파탄의 늪에 빠뜨린 것이다.

12월18일이 세기말 최후의 기회다.

또 다시 지도자를 잘못 선택하면 21세기 문턱에서 붕괴 위험을 피하기 어렵다.

일류정치로 유명한 독일 우파 지도자들은 '라인강의 기적' 후 기민 - 사민 - 자민당의 좌.우파 대연정 (1996년 12월) 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대선에서 어느 후보가 국민의 대명 (大命) 을 받더라도 대연정을 각오해야 국난극복 (國難克服) 이 가능하다.

주섭일 국제문제대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