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글로벌 아이

세상을 바꾸는 실용의 리더십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7면

푸틴이 겨냥한 건 실은 서유럽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미국의 조지 W 부시 당시 대통령이 동유럽에 미사일 방어(MD) 기지를 짓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부시는 푸틴을 조롱이라도 하듯 미사일 기지 예정지인 체코를 방문했다. 그러고는 “푸틴의 개혁은 탈선했다”며 러시아를 자극했다.

G8을 앞두고 벌어진 두 정상의 기 싸움에 회담장 분위기는 좋을 리 없었다. 기자는 당시 현장에서 회담 진행 상황을 지켜봤는데 ‘대립’‘마찰’‘중재’ 같은 단어만 이어졌다. 그러다 보니 회의 결과도 신통치 않았다.

가장 중요한 의제였던 온실가스 감축은 미국과 러시아의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뒷전으로 밀렸다. 미국이 향후 감축 논의에 참여하겠다고 알맹이 없는 약속을 한 게 위안거리였다.

지난주 런던에서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담이 열렸다. 세계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주요국이 머리를 맞대자는 취지였다. 그런데 이번 회담 분위기는 2년 전 G8 때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언뜻 보면 회담의 이슈가 경제 문제였기 때문인 듯 보이지만 그보다는 회담에 참여한 리더가 바뀐 덕분이었다.

새 멤버인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은 유일한 리더 노릇을 안 하겠다”는 약속을 확인이라도 하듯 각국 리더들을 돌아가면서 치켜세웠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 역시 전임자처럼 미국과 유럽의 의견에 사사건건 제동을 걸지 않았다. 지난해 금융위기 당시 유로존(유로화 사용권)의 역사적인 합의를 이끌었던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과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는 세계 시장에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 결과 기대 이상의 큰 성과가 나올 수 있었다. 2년 사이에 국제 무대를 이끄는 리더들이 힘겨루기보다 실용을 중시하는 성향으로 바뀐 결과다. 폼을 잡는 제왕적 리더에서 결과를 만들기 위해 직접 뛰는 최고경영자(CEO)형 리더로 교체된 것이다.

이번 회담이 끝나고 화제가 된 사진 한 장은 최근의 달라진 세계 무대 분위기를 잘 설명해준다. 오바마와 메드베데프, 이탈리아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얼굴을 한데 모으고 활짝 웃으며 찍은 사진이다. 2년 전 부시와 푸틴이 이런 포즈를 취할 수 있었을까. 당시처럼 서로를 견제하고 체면 차리기에만 급급했다면 이번 회담에서도 가시적인 성과는 기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2007년 부릅뜬 눈의 푸틴 사진과 이번 G20에서 미국·러시아·유럽의 세 정상이 다정하게 찍은 사진. 이 두 장의 사진이 앞으로 달라질 세계 질서를 보여주는 것 같다.

런던에서 전진배 파리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