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인생의 조각들, 그러나 깊은 울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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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호 06면

무심한 듯한 원제(‘여름의 시간’)도 좋지만, 한국어 제목이 참으로 문학적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조금 장난을 부려 ‘인생의 조각들’로 제목을 바꿔 보고 싶은 충동이 인다.

영화는 평화로운 프랑스 전원마을, 한 중상층 가정의 생일파티에서 시작한다. 미국·중국 등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세 자녀가 모처럼 한데 모였다. 예술에 깊은 감식안을 가진 어머니는 자신이 소장한 여러 미술품에 대한 사후 처리를 큰아들에게 당부한다.

운명을 예감한 듯 어머니가 갑자기 숨지자 자식들은 시골 집과 미술품 처리에 나선다.사실 이렇게 줄거리로만 이 영화를 기술하는 것은 진짜 멋없는 일이다. 영화를 가장 맥없이 보는 방법이기도 하다. 영화는 어머니의 죽음, 자식들의 작은 갈등, 이기심 등 사소한 인생의 조각들에서 깊은 울림을 끌어낸다.

그리고 이 영화의 진정한 매혹은, 재산 처분이 다 끝나고 영화가 끝났다고 여겨질 무렵 이어지는 사족 같은 에피소드다. 시골 집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기 직전 큰아들의 딸 친구들이 MT를 온다. 카메라는, 떠들썩하게 노래하고 춤추고 약을 하고 키스를 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쫓는다.

정적이 흘렀던 이 집에 활력이 넘치는 순간이다. 그리고 영화 도입부에서처럼 카메라는 집 안 구석구석을 손으로 훑듯 훑어 간다. 집이 그저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가족이고 세대이고 삶임을 함축하는 인상적인 장면이다.

집 안 곳곳을 유연하게 흐르는 카메라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로 유명한 에릭 고티에 촬영감독의 것이다.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과 ‘클린’ 등에서 계속 호흡을 맞춰 왔다. 여성 감독의 영화로 착각할 만큼 가족에 대한 섬세한 연출력을 보여 준 아사야스 감독의 첫 번째 가족영화. ‘절친’인 허우샤오셴 감독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듯 “감독의 가장 동양적인 영화. 시간의 흐름을 이 정도로 잘 표현한 영화도 드물다”(‘르 누벨 옵셀바퇴르’)는 평을 받았다.

장 바티스트 카미유 코로, 에드가 드가, 루이 마조렐(프랑스 아르누보식 가구 디자이너) 등의 진품이 등장하는 것도 이채롭다. 오르세 미술관 개관 20주년 기념작. 콧대 높은 오르세가 이례적으로 내부 전시실·복원실을 공개한 배경이다. 유품을 미술관에 기증한 큰아들 내외가 남들은 무심코 스쳐 지나가는 작품 앞에서 소회에 잠기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이를 두고 ‘르몽드’는 “예술적 창조란 매우 사적인 것을 공적인 공간으로 옮기는 모험적 행위란 것을 이야기한다”고 썼다.

3남매로는 샤를 베를랭, 쥘리에트 비노슈, 제레미 레니에 등 유럽의 실력파 배우들이 출연한다. 자유분방하고 고집 센 딸로 출연한 비노슈 외에는 조금 낯선 배우들이지만, 유럽 배우 특유의 지적이고 섬세한 연기를 선보인다. 큰아들 역의 샤를 배를랭은 ‘권태’에서의 파격적인 정사 신으로 잘 알려진 배우. 레니에는 다르덴 형제의 ‘프로메제’ ‘더 차일드’에 이어 출연하며 연기파로 자리를 굳혔다. 최근에는 ‘어톤먼트’ ‘킬러들의 도시’ 등 할리우드 영화에도 출연했다.

#감독의 말=“‘한 세대의 중심이 다른 세대로 교체될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해 시간이 지날수록 가족의 형태가 바뀌고 변화되는 과정을 보여 주며 관객과 소통하고자 했다.” 실제 감독은 시나리오를 마치고 촬영을 준비하던 중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비운을 맞았고 시나리오를 재수정했다. 그만큼 ‘여름의 조각들’은 그의 사실적인 감정이 배어 있는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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