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인 희생자 발굴, 진상규명 활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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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대 고인돌 동아리 회원들이 마산시 진전면 여양리에서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한국전쟁 54주년이 넘도록 좌우 대립이 심했던 경남지역의 민간인 학살현장은 그때의 아픔을 그대로 안고 있다. 민간인 피해 실태를 추적해 온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전국 유족회'는 경남지역서 민간인 학살 현장을 세곳 정도로 꼽고 있다. 또 미군 공습에 의한 민간인 학살지역은 도내서만 80여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미군 공습 피해 현장에는 탄흔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아 당시 정황은 증언에 의존하는 방법뿐이다. 하지만 아군측이 학살한 곳에서는 유골들이 대량으로 묻혀 있다. 전쟁은 잊혀져 가지만 유골을 중심으로 다양한 진상규명 운동들이 전개되고 있는 현장을 찾아본다.

◆ 마산 진전면=2002년 9월 태풍 '루사'의 영향으로 여양리 산태골에 매장돼 있던 유골들이 유출되면서 소문이 사실로 확인됐다.

2003년 들어 마산시가 유족회와 합의하여 이 일대 임야 8000여평을 매입해 합장키로 하고 지난 4월부터 인부들을 동원해 유골 수습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수습이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는 것을 본 경남대 사학과 이상길 교수팀이 발굴을 자처하고 나섰다. 이교수는 유족회와 협의하여 지난 3일부터 발굴을 맡고 있다. 지금까지 150구를 발굴했으며 앞으로 15구쯤 더 발굴할 계획이다.

전문 발굴팀이 맡는 바람에 간과할뻔 했던 학살당시 정황들이 많이 포착됐다.

M1과 MG50 탄피가 발견돼 학살당시 무기를 추정할 수 있다. 발굴팀은 M1탄피가 주로 국군이 사용한 것이어서 국군에 의한 학살로 추정할 수 있는 단서다. 인부들에 의한 마구잡이식 발굴에서는 찾아낼 수 없는 성과였다.

M1탄피가 몇점만 발견 된 것으로 미뤄 다른 곳에서 사살 한 뒤 옮겨 묻는 과정에서 확인사살용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MG50 탄피 발견은 민간인 학살에 대공용 화기까지 동원돼 잔인하게 학살한 것으로 보고 있다.

발굴팀은 트럭 4대(대당 40~50명 탑승)와 쓰리쿼터 1대(20명)에 타고온 사람들이 끌려갔다는 주민들의 증언에 따라 180~200명 정도가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들은 당시 진주 형무소에 수용됐던 보도연맹에 속했던 민간인들로 알려져 있다.

발굴팀은 고급버클이 달린 허리띠와 의치가 많이 발견된 점으로 미뤄 피해자들 중에 부유층이 많았던 것으로 보고 있다.

발굴팀은 장마가 오기전에 유골발굴을 마치고 마산시의 지원을 받아 DNA 검사 등을 통해 유골을 가족들에게 돌려주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주인을 찾지 못하는 유골은 주변에 조성할 합장묘에 안치할 계획이다.

이상길 교수는 "이번 발굴에서 나온 유류품과 기록, 증언 등을 종합하면 진상규명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거창 신원=부산고법 제5민사부는 지난달 17일 문병현(80)씨 등 거창양민학살사건 희생자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항소심에서 원고패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거창사건은 1950년 2월 발생했고 학살책임자에 대한 판결은 같은해 12월 선고됐으므로 판결선고일로 부터 3년, 사건발생일로 부터 5년이 지났으므로 소멸시효가 지났다"라고 밝혔다.

이같은 항소심 판결은 유족들이 신원권(伸寃權,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고 유족들의 원한을 풀 권리)에 따라 국가는 위자료 지급의무가 있다는 1심 판결을 뒤집는 것이다.

거창사건 희생자와 유족 324명은 2001년 2월 창원지법 진주지원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으며 당시 재판부는 국가의 신원권을 인정해 유족들에게 40만원씩 지급하라는 원고 일부 승소판결을 내렸었다.

유족회측은 대법원 상고와 헌법소원을 통해 국가의 배상책임을 끝까지 이끌어 내겠다며 반발하고 있다.

이 사건은 1951년 2월 국군이 거창군 신원면 일대서 700여명의 주민을 학살한 사건. 피해자 묘는 거창군 신원면 괴정리에 있다.

◆ 산청 시천=외공리에 대형무덤 6기가 있다. 2000년 8월 이가운데 한곳에서 150여구의 유골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민간인 학살 현장으로 알려졌다. 남은 5기중 국유지 1기를 제외한 4기가 자리잡은 곳은 사유지 300여평.

외공리 양민학살 대책위는 무덤땅 1평사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대책위는 "훼손을 막고 진상규명을 위해 현장을 보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책위는 이곳의 희생자들도 '거창사건 등 관련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포함해 줄 것을 건의하고 있다.

김상진 기자

*** 피학살자 전국유족회 조현기 위원장 인터뷰

"6.25때 국군과 미군에 의해 이뤄진 민간인 학살을 언제까지 덮어 둘 수 없습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전국 유족회' 조현기(42.사진) 집행위원장은 진상규명을 강조했다.

그는 "1960년대 유족회가 결성됐으나 제3공화국 정부가 유족회 간부 구속 등으로 탄압하는 바람에 지금껏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유골이 남아 있는 현장을 훼손하지 말고 고고학자 등 전문가들에게 맡겨 제대로 발굴한다면 당시 정황에 상당히 접근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 증거로 그는 마산시 진전면 여양리 민간인 학살현장을 대표적으로 들고 있다.

지난 4월 대책위와 마산시가 인부를 동원해 유해를 수습한 이일대 산태골 숯막지역에서는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는 증거물을 전혀 찾지 못했다.

하지만 경남대 팀이 맡았던 주변 폐광과 돌무지 지역에서는 M1탄피와 신분증 주머니, 안경 등이 많이 나와 당시 정황을 상당히 파악해 낸 점을 들고 있다.

그는 "전문팀의 발굴은 무엇보다 유골을 인체별로 구분해 수습함으로써 유족들에게 돌려 줄 수 있고 피해자의 원한을 조금이라도 달랠 수 있는 점이 좋다"라고 말했다.

유족회측은 6.25때 경남도내서 25만여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남 함안출신인 그는 1950년 8월20일 군북면 장지리에서 두살짜리 누나를 미군 공습으로 잃은 아픔을 안고 있다.

98~99년 사이 현대자동차 서비스 노조위원장을 하다 구속된 뒤 고향으로 내려와 유족회 일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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