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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복기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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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복기는 실수 찾기다. 진정한 실수 찾기는 훗날 연구회 등에서 제3자들에 의해 반복된다. 다들 한 가닥 하는 사람들이니까 너도나도 주장을 굽히지 않다 보면 중구난방이 되기도 한다. 갑은 이 길이 옳다 하고 을은 이 길이 옳다 싸우다가 복기는 사라지고 엉뚱한 점심내기 바둑이 시작된다.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도 가끔은 이렇게 실소를 자아내게 만든다. 그러다가 이창호 급의 고수가 나타나면 목소리들은 숨을 죽이고 비로소 복기의 본모습을 회복한다. 권위는 근사하다. 제아무리 이창호라도 다 알 리 없다. 이창호 9단에게 물어보면 모르는 것 천지라고 한다. 그래도 복기 현장에 믿음 가는 고수의 존재는 참으로 절대적이다.

‘프로스트 대 닉슨’이란 영화를 봤다. 쇼 프로 진행자인 프로스트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한 닉슨 대통령과의 인터뷰를 성공의 발판으로 삼으려 하고, 닉슨은 어수룩한 하수(?)와의 인터뷰를 통해 정계 복귀를 꿈꾼다. 닉슨에 대한 TV 복기가 이렇게 이루어진다. 복기이면서 한 판의 승부였던 이 인터뷰에서 닉슨은 압승의 형세였으나 막판에 불각의 역전패를 당한다. 처음으로 닉슨의 사과를 받아낸 이 프로는 공전절후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빚더미의 나락으로 떨어질 뻔한 프로스트는 소원했던 꿈을 이룬다.

목적이 그리 깨끗하지 않은 ‘사이비 복기’였으나 결과적으로 최고의 복기가 된 이 미국적 얘기에 흐흐흐 웃었다. 머리의 실수와 마음의 실수에 대한 언급도 꽤 바둑적이었다. 복기는 감정이나 운 같은 승부의 또 다른 요소를 걸러내고 수만 정제한다. 그러나 복기하는 사람은 느낀다. 머리의 실수보다는 마음의 실수가 더 결정적이었음을 안다.

복기는 바둑을 잘 두기 위한 최선의 공부다. 한 판의 바둑도 열 번 스무 번씩 놓아보는데,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지금도 얼마나 많은 복기들이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을지 눈에 선하다. 외환위기 사태 같은 건 백 번도 넘게 복기했겠지. 한국전쟁은 천 번은 복기했겠지.

일본의 전설적 고수 사카다 9단은 어렸을 때 복기에 끼어들어 너무 자신만만한 주장을 펼치다 선배로부터 “예의가 없다”는 벼락 같은 호통과 함께 귀뺨을 얻어맞았다. 천재 소년 이창호와 스승 조훈현 9단의 복기는 구경꾼마저 애간장이 녹았다. 바둑을 진 스승은 이 수가 어땠느냐고 계속 묻는데 바둑을 이긴 제자는 이마의 식은땀만 닦아낸다. 미안한 나머지 그렇지 않아도 모기 소리 같은 목소리가 점점 더 작아진다. 복기는 쉽지 않다. 무엇보다 속내를 드러내야 하고 자기만의 비법도 털어놔야 한다. 불편한 라이벌 조훈현과 서봉수의 복기는 거의 이뤄진 적도 없지만 이뤄졌다 해도 속마음을 드러냈을까. 그러니 회고록 한 편을 제대로 쓴다는 것, 역사를 제대로 기록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박치문 바둑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