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퇴직자 2명의 ‘나는 이렇게 성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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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위기가 닥치면서 명예퇴직 등으로 직장을 떠나는 이들이 늘고 있다. 한창 일할 나이에 뭘 해야 할지 막막하기 마련이다. 외환위기 직후에도 퇴직자가 쏟아졌다. 졸지에 직장을 잃었지만 ‘7전 8기’의 정신으로 다시 일어선 이들이 있다. 실직자에서 프랜차이즈 사장으로 변신한 두 명의 성공 노하우를 소개한다.

글=김기환 기자, 사진=권혁재 기자

베트남 쌀국수 체인점 운영 박규홍씨
손님 500명 모셔 국물 맛 시험 또 시험

#베트남 쌀국수전문점 ‘호아센’(www.hoasen.co.kr)을 운영하는 박규홍(49) 대표는 호텔리어였다. 87년 롯데호텔에 입사해 식음료 사업 부문에서 일했다. 부장 승진을 눈앞에 두고 있던 중 외환위기가 터졌다. 회사는 직원들에게 명예퇴직을 권했다. 그도 피해갈 수 없었다. 99년 말 퇴직하는 대신 2002년 10월까지 임시직으로 근무하는 조건이었다.

그는 외식산업을 해보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호텔 일을 하면서 2002년 6월 외식업법인인 ‘우리개발’을 설립하고 사업계획을 짰다. 같은 해 11월 직장을 그만둔 그는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시장조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패밀리 레스토랑과 스테이크, 그리고 베트남 쌀국수 세 가지를 염두에 뒀다. 미국에서 패밀리 레스토랑과 스테이크집을 돌며 점심과 저녁을 모두 양식으로 먹었더니 입에 물렸다. 그래서 베트남 쌀국수에 관심을 집중했다. 당시 미국에서 팔던 제품은 향이 독특해 거부감을 줄 수 있었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팔각·고수 등 19가지 재료를 배합해 한국인이 좋아할 만한 향을 내려 애썼다.

박씨는 사업 시작 전 남의 가게를 빌려 500명 이상을 상대로 맛을 시험했다. 2003년 3월 역삼동에서 첫 점포를 열었다. 5월엔 7개 베트남 쌀국수 브랜드가 경쟁하던 서울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에 진출했다. “압구정동에서 밀리면 끝이라고 생각했어요. 본사에서 회의를 마치고 점포에 나가 낮 12시부터 다음날 오전 1시까지 일했습니다. 불도저식으로 밀어 붙이니 이직한 직원도 있었지만, 자리 잡을 때까지 꼬박 6개월을 그렇게 보냈습니다.”

노력은 열매를 맺었다. 단골 고객이 서초동에 첫 가맹점을 열겠다고 나섰다. 이후 7년 동안 가맹점은 35개로 늘었다. 그의 회사는 현재 식자재·도소매·유통업·건설 등으로 영역을 넓혀 자본금 50억원 규모의 중견 회사가 됐다. 한때 그는 “외환위기 때 명예퇴직한 선배가 사업에 실패했다”는 소식에 불안해 하던 퇴직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성공했다는 소식도 알려져 퇴직자들에게 희망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사업가로 자리 잡았다.



삼겹살·치킨 체인점 운영 김태환씨
배달 늦다 불평에 무릎 꿇고 빌기도 했죠

#김태환(46)씨는 1999년 12월 퇴직금도 받지 못한 채 직장을 잃었다. 대기업에 부품을 대는 회사에서 영업 일을 했는데 외환위기로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정리해고됐다. 아내가 모아둔 돈과 집 전세금까지 털어 마련한 2억원으로 경기도 수원에 고깃집을 차렸다. “이윤이 많이 남는다”는 지인의 말을 듣고서다. 하지만 가게 위치가 여고 바로 앞이었다. 여고생으로 가득한 학교 앞 골목에서 고깃집 장사가 잘될 리 없었다. 시장조사도 하지 않고 시작한 고깃집은 1년 만에 간판을 내려야 했다. 그는 “훌쩍 떠나 며칠씩 가게에 들어오지 않은 적이 많았다”며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이혼까지도 생각했던 시기”라고 회고했다.

2000년 12월. 그는 마지막 기회를 잡겠다는 생각으로 지인에게 6000만원을 빌렸다. 수원에 프랜차이즈 바비큐치킨 전문점을 열었다. 주위 사람들이 말렸다. 8차로 대로변에 위치한 데다 행인도 드문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번엔 시장을 철저히 조사했다. 유동인구가 적었지만 주위에 소규모 사무실이 많았다. 1㎞가량 떨어진 곳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있어 배달 수요도 많을 것으로 봤다. 그는 인근 사무실 문을 두드리며 전단지를 돌렸다. 맵거나 짜다고 불만을 표하는 손님에겐 음료수라도 한 병 더 챙겨 줬다. 그는 “늦게 배달됐다고 불평하는 고객의 집 앞에서 무릎 꿇고 기다린 적도 있다”고 말했다. 차츰 단골이 늘어 그의 가게는 1년 만에 월 1000만원의 매출을 올리게 됐다.

그러자 프랜차이즈 본사에서 그를 인천 지사장으로 영입했다. 입지가 좋지 않은데도 높은 매출을 올린 점을 평가한 것이다. 지사장이 된 그는 상권을 찾아다니며 시장조사에 발품을 팔았다. 처음 6개월 동안 점포를 한 개도 열지 않을 정도로 돌다리를 두드렸다. 첫해에 15개 가맹점을 냈고, 3년 만에 110여 개로 늘렸다. 당시 한 가맹점 점주를 찾아가선 “궁지에 몰렸으면 열심히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눈물이 쏙 나올 정도로 다그쳤다. 손에 쥔 마지막 돈 3000만원으로 호프집 장사를 시작했다면서도 매장 관리를 소홀히 하던 점주였다. 김씨는 “과거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였다”고 했다.

2005년 1월 그는 자신의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했다. 저가 삼겹살이 인기를 끌던 시장에서 고가 삼겹살 브랜드 ‘화계돈가’로 승부를 걸었다. 인삼 사료를 먹인 돼지고기를 쓰고 전통 장을 소스로 만들어 내놨다. 이듬해엔 요리주점 브랜드 ‘다라치’ 사업을 시작했다. 나노기술을 이용한 항균 맥주를 선보였고, 맥주를 시원하게 마실 수 있도록 자체 개발한 항아리 잔을 썼다. 올해는 치킨 배달 전문점인 ‘치킨 다라치’ 브랜드를 추가했다. 현재 3개 브랜드의 가맹점 13곳을 가진 그의 직함은 ‘태풍 F&B 사장’이다. 김씨는 “가맹점 수가 아니라 수익을 내는 알짜 점포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누구나 궁지에 몰릴 수 있지만 벗어나는 길은 노력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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