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까지 뜨는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우리가 혼탁한 대선정국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에 동북아시아 국제정치의 지각 (地殼) 구조에 메가톤급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유럽과는 5년 정도의 시차를 두고 냉전 후의 새 질서가 태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 변화는 필연적으로 남북관계 및 21세기 동북아의 지역안보와 한국의 대외관계에 직접 영향을 미칠 성질의 것이다.

러시아를 중심에 두고 지각 변동의 방향과 파장을 살피면 이해하기가 쉽다.

6일자 조간신문의 국제면을 보자. 중국과 러시아가 우수리강의 공동개발에 극적으로 합의했다는 보도가 실려 있다.

우수리강은 오랫동안 중국과 소련이 국경분쟁을 일으켜 온 곳이다.

그리고 우수리강은 1956년 흐루시초프의 수정주의 노선 등장 이후 두 나라가 벌인 이념논쟁을 상징하던 섬이기도 하다.

그 대립의 섬이 협력의 섬으로 바뀐다는 것은 지정학적으로 한반도의 배후를 이루는 대륙의 양대세력이 오랜 갈등과 대립관계를 청산하고 전략적인 동반자 관계가 된다는 의미다.

러시아는 일본과도 전후 (戰後) 를 청산하는 큰 이정표를 세웠다.

러시아와 일본은 지난 2일 크라스노야르스크 정상회담에서 북방영토에 관한 93년 도쿄 (東京) 선언에 따라 2000년까지 평화조약을 체결하자는데 합의했다.

도쿄선언은 평화조약 체결의 전제로 북방영토 문제를 해결하자고 못박고 있다.

옐친은 다음 세대로 넘기자고 하던 영토 문제 해결을 자신의 임기가 끝나는 2000년까지 해결하자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러시아는 국토가 유럽에서 극동에 걸쳐 있는 유라시아국가다.

그런 러시아로 하여금 시선을 동방으로 돌려 중국 및 일본과의 관계를 서둘러 개선하도록 등을 떼민 데는 크게 두가지 요소가 작용했다.

하나는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 의 동방 확대다.

옛 동구권 국가들의 가입으로 NATO의 세력권은 러시아의 문턱에까지 와닿고 있다.

거기다 소련 붕괴후 미국이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세계의 운명을 농단하는데 대한 반발로 아시아 주요 국가들과 관계를 강화하는 것이 러시아의 중요한 세계 전략으로 떠오른 것이다.

러시아의 변화를 촉구한 다른 하나의 요소는 경제다.

러시아는 시베리아의 경제 개발에 러시아 경제 개혁의 성패가 달렸다고 생각한다.

사할린섬 일대의 석유와 천연가스 개발은 이미 시작됐다.

다음엔 이르쿠츠크 일대의 천연가스를 한국.중국.일본을 포함한 4개국이 공동으로 개발, 몽골을 경유해 중국의 산둥 (山東) 성까지 3천4백㎞의 파이프 라인을 건설한다는 원대한 구상을 갖고 있다.

일본.러시아 정상회담은 장쩌민 (江澤民) 중국 국가주석의 미국 방문과 같은 시기에 열렸다.

옐친은 9일 중국을 방문한다.

장쩌민의 지난 4월 러시아 방문에 대한 답방이다.

그뒤를 이어 리펑 (李鵬) 중국 총리가 일본을 방문한다.

하시모토 류타로 (橋本龍太郎) 일본 총리는 지난달 이미 중국을 방문했다.

내년에는 옐친의 일본 방문과 클린턴의 중국 방문 일정이 잡혀 있다.

한반도에 이해 (利害) 관계를 가진 강대국 수뇌들이 이렇게 꼬리를 물고 교차방문과 상호방문을 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우리의 주변환경은 벌써 다음세기로 바뀌고 있다.

러시아는 일본 및 중국과의 '전략적 동반자관계' 를 통해 소련 붕괴로 잃었던 영향력의 일부를 되찾고 동북아 4강의 자리에 복귀하고 있다.

주변 4강은 벌써 통일된 한국에서의 이해까지 시야에 두고 있다.

우리는 주변환경의 변화에 대비하고 있는가.

누구보다 치열하게 21세기를 생각해야 할 대선후보들의 대외 불감증과 무지, 방향감각을 잃고 있는 정부를 보면 우리는 오히려 조선 조정의 국제음치 (音癡) 들이 속수무책으로 나라를 외세의 각축에 내맡긴 19세기말로 되돌아가는게 아닌가 걱정된다.

대선후보들은 세상 일은 외면하고 저마다 자신이 집권하는 것이 최고선 (最高善) 이라고 주장한다.

세상은 무섭게 바뀌면서 압박해 오는데 우리는 '우물안 개구리들' 의 합창을 들으면서 어디까지 뒷걸음질 쳐야 하는 것인가.

김영희 <국제문제대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