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통치지 않고도 소통하는, 형 같은 목사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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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호 31면

잘못된 소통을 소재로 한 유머 한 토막.
흥부가 뺨 맞은 진짜 이유가 있단다. 배고픈 흥부가 밥 냄새를 맡고 인기척을 낸다. 형수는 아무 반응이 없다. 흥부는 마른기침을 하고 나지막하게 한마디 한다. “형수님, 저 흥분데요” 당황한 놀부 마누라는 밥 푸던 주걱으로 귀싸대기를 올렸다. “형수님, 저 흥분돼요”로 잘못 들은 것이다.

내가 본 이동현 목사

통(通)하지 않으면 통(痛)한다. 시장실패(market failure)보다 무서운 게 소통실패(communication failure)다. 생산자는 소비자와 소통할 줄 알아야 한다. 부모는 자식과, 교사는 학생과 잘 소통해야 한다. 소통을 잘해야 훌륭한 어버이요 스승이다.
교회도 세상과 소통해야 한다.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없다.

이동현 목사는 세상과 소통할 줄 아는 목사다. 이 목사가 지향하는 교회는 ‘철저하면서도 독선적이지 않은 교회, 뜨거우면서도 광신적이지 않은 교회, 질서가 있으면서도 자유로운 교회, 신선하면서도 포근함이 있는 교회’다. 그는 소통을 중시하는 목회를 통해 그런 교회를 실현하고 있다.

무릇 소통의 기술을 익히지 못한 사람은 호통부터 친다. 소리가 크다고 진리가 아닌데도 말이다. 이동현 목사의 목소리는 경쾌하면서도 묵직하다. 호통치지 않아도 사람들은 그를 잘 따른다. 그는 어느 자리에서나 맨 먼저 지갑을 연다. 그는 누구에게나 ‘형’이다. 이 목사가 담임으로 있는 교인들도 나처럼 그를 형이라고 부르고 싶어 할 거다. “형, 밥 좀 사줘.”

나는 평화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일이 있다. 자식이 어버이를 닮듯 교인들은 이 목사를 빼쐈다. 그들은 심각하기보다 싱그러웠고 삐딱하기보다 너그러웠으며 폼 잡기보다 고개를 숙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움켜쥐기보다 퍼주길 잘 한다. 화재를 겪은 다른 교회를 위해 헌금하자면 주저하지 않고 주머니를 턴다. 전업주부들의 수고를 위로하자며 이 목사가 깃대를 들면 너나없이 나서서 희망의 불씨가 된다. 평화교회는 ‘아! 줌마’ 축제를 매년 주관한다. 잃어버린 한국 역사를 찾아오자고 하면 주저하지 않고 거액을 쾌척한다. 제 그림자를 그늘로 삼아 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목사와 평화교회는 이런 삶의 이치를 안다.

이 목사는 소통을 위해 공부도 열심히 한다. 어느 날 내게 말했다. “아우, 나 연세대학에 편입했어.”(아니 무슨 흥분되는 소리?) “무슨 말?” “응, 목사도 경제를 알아야 하겠더라고.” 지적인 게으름을 피워도 좋을 나이에 그는 고난의 길을 택했다. 소통하는 목사로 살기 위해서다.

얼마 뒤 사석에서 물었다. “할 만해요?” “죽을 지경이지 뭐.” “젊은 교수들이 안 봐줘요?” “봐주긴…나이 들었다고 쉽게 할 생각 말라고 창피(?) 주던데.”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난 목사가 아니라 학생이잖아!”(‘와, 왜 내가 열 받지?’)

이런 이동현 목사와 평화교회에서 나는 한국 교회의 미래를 읽는다. “소통하는 리더, 소통하는 교회”를 향한 그의 소통 사역은 나를 흥분시키는 현재진행형이요, 설레게 하는 미래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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