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틴틴] '아버지의 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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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총,원제 Le fusil de mon pere
이네 살림 지음, 유정애 옮김
한빛문화사, 222쪽, 8500원

쿠르드족은 슬픈 운명을 지닌 민족이다. 2500만이나 되는 인구가 다섯 나라로 쪼개지고, 뿔뿔이 흩어져 떠돌아 다니는 세계 최대의 유랑민족이다. 1923년 로잔 조약에 의해 강대국들이 쿠르드족의 삶의 터전을 갈라놓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글과 말을 사용하지 못하고, “나는 쿠르드인이다”고 외치기만 해도 감옥으로 가야 한다. 그들을 더욱 절망케하는 것은 그들을 박해하는 나라들이 다름아닌 같은 이슬람교를 믿고 있는 이웃 형제국가라는 것이다. 서구 사회도 주변 국가들과의 이해관계 때문에 유독 쿠르드족 학살과 문화 말살 정책에 대해서만은 침묵과 방조로 일관해 왔다.

이것이 우리가 쿠르드족의 삶을 있는 그대로 접하지 못하게 한 걸림돌이었다. 적어도 이네 살림 감독의 『아버지의 총』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 작품은 쿠르드가 낳은 세계적 영화감독 이네 살림의 자전적 소설이다. 소설 속 주인공 아자드의 애절한 눈빛과 응어리진 마음을 통해 쿠르드족이 처한 암담한 현실과 극한적인 상황에서 피어나는 뭉클한 가족애를 읽는다.

어머니가 까주는 빨간 석류 맛을 다시며 뽕나무 숲에 묻혀 살던 아자드는 이라크군의 폭격을 받고 가족들을 잃으면서 쿠르드족의 아픔과 조국의 의미를 깨닫는다. 외국어와 다름없는 아랍어를 익히고, 자신의 가족을 앗아간 사담 후세인을 위해 만세를 부르며 크게 잘못된 현실을 깨달아간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자신의 모국어로 진실을 전하고 예술적 욕구를 마음대로 표현하리라 각오를 다진다. ‘아버지의 총’ 대신 ‘문화’라는 새로운 무기를 들고 쿠르드족의 존재를 위해 투쟁한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가 원했던 판사나 검사 대신 영화 감독이 된다. 그가 바로 이네 살림이다. 2003년 베니스 영화제 산마르코 상을 수상한 ‘보드카 레몬’이 그의 대표작이다.

나는 1991년 걸프전쟁 이후 오랫동안 쿠르드 난민 지역을 조사해 왔다. 이라크의 공격을 피해 수십만명의 쿠르드족이 어린 아이를 안고 험난한 산악국경을 넘는 처절함을 목격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들의 아름다운 문화와 전통을 이해할 수 있었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라크 쿠르드족은 다른 나라의 동족에 비하면 훨씬 행복하다는 점이었다. 그나마 이라크에서는 자유롭게 자신들의 말과 글을 쓰고,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으며, 자치정부를 중심으로 역사적 전통과 문화를 보존하고 있다. 1000만명 이상의 쿠르드족을 소수민족으로 갖고 있는 터키나 400만 쿠르드인이 살고 있는 이란, 그리고 이웃 시리아 등지에서는 문화적 전통의 파괴가 더욱 심각한 상태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된 아르빌과 모술은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 중심도시다. 우리가 군대를 파견할 지역이다. 이라크 평화재건과 전후복구를 위해 그동안 우리가 관심을 가져 왔던 아랍문화와 역사와는 전혀 다른 지역이다. 불행히도 우리나라에는 쿠르드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전문가가 거의 없다. 쿠르드 문화나 역사에 관한 자료도 매우 제한되거나 지나치게 전문적이다.

『아버지의 총』은 청소년에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복잡함에 대한 안목을 길러줄 뿐만 아니라, 파견을 앞둔 병사들이나 그 지역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 책이다. 현지 사정과 문화를 이해하지 않고는 우리가 목표로 하는 이라크 평화재건과 그들과의 진정한 관계는 한갓 구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의 독자들이 이라크 쿠르드 지역의 환경과 사람들의 풍습, 이라크에 대한 저항과 독립투쟁, 미국을 친구로 받아들여야 했던 약소민족의 비애, 새로운 조국을 꿈꾸며 수천년 문화를 지키고자 하는 쿠르드인들의 힘든 과정을 감동적으로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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