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억 해외 비자금까지 캐면 ‘박연차 게이트’ 될 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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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관들은 관할 부산지방국세청 소속이 아닌 서울지방국세청 소속이었다. 그것도 심층·기획 세무조사를 담당하는 조사4국이었다. 그들은 박 회장의 수백억원대 비자금과 탈세, 그리고 권력형 비리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박 회장의 비리 네트워크의 상당 부분이 이때 드러났다. 그와 친분이 있는 정치인과 관료, 검찰 간부 등 수십 명이 여비서의 다이어리에 등장했다. 만남과 통화 기록, 그리고 은밀한 거래 내역이 담겨 있었다.

국세청발(發) 초벌 ‘박연차 리스트’가 만들어진 과정이다. 박 회장이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15억원을 빌려준 차용증도 이때 확보됐다. 한상률 당시 국세청장은 조사 결과를 청와대에 직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국세청은 세무조사 4개월 만인 지난해 11월 25일 박 회장을 탈세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폭로 선택한 사업가=고발 사건은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맡았다. 검찰총장 직할의 최정예 특수수사팀이다. 박 회장은 고발된 지 17일 만에 구속됐다. 탈세 혐의 외에 앞서 중수부가 진행하던 농협 자회사 휴켐스 인수 비리와 주식 투자로 수백억원의 시세 차익을 챙긴 혐의가 추가됐다. 하지만 검찰의 1차 수사에서 ‘박연차 리스트’의 실체는 확인되지 않았다. 박 회장은 구속되면서도 정·관계 로비에 대해 “그런 적 없다”고 잘라 말했다.

검찰도 난감한 상황이었다. 당시 수사팀 관계자는 “정·관계 로비를 입증하려면 ‘플리 바기닝’(유죄협상제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현금과 차명계좌, 해외 계좌 등을 이용한 수상한 자금 흐름이 많지만 박 회장의 진술 없이는 처벌이 어렵다는 얘기였다. 공식적으로는 ‘리스트가 없다’고 밝혔지만 언젠가 터질 시한폭탄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검찰은 수사 자료에 등장한 일부 검찰 간부에게 인사상 불이익을 주기도 했다.

올 2월 수사팀이 교체되고 2라운드 수사가 진행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4개월간의 세무조사(지난해 8~11월)와 4개월의 검찰 수사(지난해 12월~올 3월)가 성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박 회장이 입을 열면서 검찰발 ‘박연차 리스트’가 새롭게 써지고 있다. 미완성이던 리스트가 박 회장의 협조로 완성되고 있는 것이다.

검찰 관계자는 “객관적 증거를 모아 제시하면 박 회장도 금품 로비를 명확히 진술한다”고 말했다. 검찰의 집요한 정공법에 박 회장이 굴복했다는 게 수사팀의 설명이다. 또 박 회장의 자녀들이 처벌될 수도 있다는 검찰의 압박 카드가 박 회장의 입을 열게 했다는 분석도 있다. 사면초가의 상황에 처하자 ‘폭로’를 선택하는 사업가적인 판단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혐의를 부인하는 피의자와 대질 신문에서는 “돈 받으셨잖아요”라며 피의자를 제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 어디까지 가나=문제는 박 회장이 무엇을 어디까지 ‘불었는지’다. 검찰은 박 회장의 진술을 더 받아내기 위한 물증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검찰의 수사가 어디로 튈지는 예측하기 힘들다. 박 회장의 근거지인 경남의 정치권 인사(이정욱·송은복·장인태)에서 중앙무대 유력 인사(이광재·추부길·박정규)로 확산되고 있다.

여야 구분도 없다. 검찰은 박 회장으로부터 세무조사 무마 청탁을 받은 추부길 전 청와대비서관이 누구를 상대로 로비를 하려 했는지도 조사하고 있다. 노건평씨가 열린우리당 공직선거 후보들에게 정치자금을 전달한 경위도 조사 중이다. 노씨는 박 회장에게 자금 지원을 지시하면서 경남 지역의 권력자로 군림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박 회장 해외 비자금의 실마리가 풀리면 수사 대상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될 수도 있다. 600억원이 넘는 박 회장 해외 비자금의 흐름이 포착될 경우에 중수부 수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을 가능성이 크다. 중수부 고위 관계자는 “수사가 금방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며 ‘길고도 강력한’ 수사를 예고했다.

김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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