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일씨 피살 충격] 'AP 테이프'로 불거진 의문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3면

▶ 24일 부산의료원에서 김선일씨 어머니 신영자씨가 울부짖고 있다. [부산=송봉근 기자]

AP가 공개한 비디오 테이프가 고 김선일씨의 피랍 살해사건과 관련해 새로운 의문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납치범들은 처음엔 한국의 이라크 추가파병 철회를 요구조건으로 내세우지 않았다는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초기 대처가 조금만 신속하고 현명했다면 김씨를 무사히 구출할 수도 있었던 것은 아닐까. 김씨가 피랍된 23일간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여섯가지 의혹을 집중 분석했다.

의문 ① 왜 23일간이나 억류했나
=먼저 살해된 미국인은 3일간 피랍

김씨에 앞서 피랍 살해된 미국인의 경우 억류 기간이 사흘에 불과했다. 그러나 김씨의 경우 23일이나 걸렸다. 가나무역 김천호 사장은 김씨의 피랍 사실이 공개된 직후인 22일 테러단체 간부들의 인척과 협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과일 선물까지 사서 갔고 협상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며 김씨가 곧 풀려날 것 같은 인상을 줬다.

김 사장은 현지 직원과 이라크 변호사를 동원해 여러 차례 협상을 벌였다고 했다. "생사를 알아야 요구조건을 들어줄 것 아니냐"고 하자 생존을 확인해 주면서 "한국인이니까 살려 주겠다"고 해 곧 석방될 것으로 믿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김 사장 개인이 납치범들의 요구조건을 들어줄 수 있었다는 의미였고, 문맥상 일단 요구조건도 듣기는 들었다는 얘기다.

결국 납치범들의 최초 요구사항은 한국군의 추가 파병과 아무 관계없는 내용일 것으로 추정된다.

18일(현지시간)에는 곧 풀어줄 것이라는 답까지 들었다고 김 사장은 말했다. 납치범들이 정치적 목적의 단체와는 전혀 다른 형태 및 내용의 인질 석방 교섭을 전개했음을 말해준다.

또 18일까지는 김씨의 신병이 '일신(一神)과 성전'이라는 전문 테러단체에 아직 넘어가지 않았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그러다 사정이 확 바뀌었다. 21일 김씨의 비디오가 알자지라방송을 통해 방영됐고 납치범들의 요구조건은 한국군 철군과 추가파병 철회였다. 김천호 사장은 처음 미군 당국으로부터 피랍 사실을 통보받고 대책도 협의했다고 했는데 뒤늦게 말을 바꿨다.

피랍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 석방협상을 시작한 과정은 어땠는지도 불분명하다.

의문 ② 납치 단체는 한 곳뿐인가

AP가 공개한 비디오테이프와 알자지라가 방영한 테이프를 비교하면 확연히 다른 분위기라는 걸 느낄 수 있다. AP 테이프에 등장한 김씨는 "진짜 테러리스트는 부시 대통령"이라고 말하는 등 미국을 비난하고 있지만 비교적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상대를 설득해볼 수도 있겠다고 여기는 김씨의 분위기와 노력이 두드러졌다. 아랍어를 쓰면 호감을 살 것으로 기대하면서 애써 아랍어를 구사하려는 모습도 보였다. 겁에 질리긴 했지만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반면 21일과 23일 알자지라에 등장한 김씨는 "나는 살고 싶다"고 울먹이는 등 극도의 공포에 질려 있었다.

또 알자지라 비디오테이프에는 무장단체의 조직(일신과 성전)을 상징하는 검은 깃발이 등장했다. AP의 비디오테이프에는 그런 깃발이 등장하지 않았다. 김씨는 아무것도 없는 시멘트벽을 등지고 말하고 있었다. 반면 AP 테이프에는 소총을 든 범인도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결국 김씨를 납치한 조직과 김씨를 살해한 조직이 꼭 같지 않을 수도 있다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의문 ③ 파병 철회 아닌 '돈' 원했나

이라크 전쟁 이후 치안이 극도로 불안해지면서 이라크에는 납치가 만연하고 있다. 최근 바그다드 등 대도시에서는 이라크인들 간 납치도 성행하고 있다. 지난 4월 만수르 지역에 사는 셰이크 자말은 한 괴한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12살 된 그의 손녀 바스마를 보호하고 있다는 사람의 전화였다. 이들은 셰이크 자말에게 10만디나르를 요구했다.

그는 경찰에게 연락했지만 자폭테러로 바쁜 경찰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했다. 결국 자말은 3일 후 납치범들이 요구한 돈을 건네주고 바스마를 찾아왔다. "손녀를 찾은 것에 만족한다. 그러나 이라크 경찰과 더불어 치안 불안을 야기한 미군의 이라크 전쟁을 증오한다"고 말했다.

전쟁 직후 납치가 극성을 부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치안 불안을 틈타 납치를 전문으로 하는 범죄조직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차 한대와 두세명이면 가능하다. 이 같은 납치조직들이 최근 저항단체나 국제테러집단을 위해 일한다는 소문도 있다.

지역 내 민간 경호원이나 자체 방위군 등으로 가장한 이들이 검문을 빌미로 외국인과 자국인을 납치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김씨를 납치한 A라는 무장단체 역시 김천호 사장과 협상하는 과정에서 보상금이 마음에 들지 않자 더 많은 돈을 제시한 국제테러단체에 김씨를 넘겼을지 모른다는 게 24일 요르단 주재 알자지라 지국장 파리스 자마르의 추론이다.

의문 ④ 테이프 왜 알자지라 아닌 AP로

김씨가 피랍된 것은 5월 31일이다. 당시 김씨는 바그다드에서 200㎞ 떨어진 미군 캠프에 물품을 납품하고 돌아오던 중 팔루자 인근에서 납치됐다.

김씨를 납치한 인질범들은 김씨 모습을 녹화한 뒤 이 테이프를 6월 초 바그다드 주재 AP텔레비전 뉴스(APTN)에 처음 보냈다. 인편으로 전해진 테이프는 너무 엉성했다. 인질범이 누구인지도 밝히지 않았고, 납치 목적도 밝히지 않았으며 김씨가 인질로 잡혀 있는지도 불분명했다. 인질범들은 어떤 목적으로 테이프를 보낸 걸까.

왜 알자지라 TV가 아닌 AP였을까. 앞서 두 미국인의 경우엔 아랍의 웹사이트에서 그들의 비디오테이프가 공개됐다. 그리고 처음부터 납치 목적도 분명히 밝혀져 있었다.

김씨의 피랍 사실이 뒤늦게 공개된 것은 알자지라에 보내져 20일(현지시간) 방영된 비디오테이프를 통해서였다.

의문 ⑤ 대사관은 정말 몰랐을까

김 사장은 6월 1, 7, 10, 11일 현지 대사관을 방문했다.무척 바쁜 나날을 보냈을 김 사장이 어떤 이유로 김씨 피랍 이후 네차례나 대사관을 방문했으며 과연 김씨와 관련해 아무런 이야기도 안 했을까.

또 실종 사실을 안 뒤 교통사고를 당한 것으로 여겨 주변 경찰서 등을 열흘간 탐문했다는 데 어떻게 대사관은 이를 까맣게 몰랐을까. 사건이 알려진 직후 외교부는 전화 통화와 e-메일을 통해 교민들의 안전을 점검하고 있다고 밝혔다. 교민에게 e-메일을 보냈다며 원문을 공개하고 기업체의 경우 대표에게만 보냈다고 밝혔다.

가나무역의 현지 직원 10여명이 모두 김씨의 실종 직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 6월 중순엔 교민들도 상당수 김씨의 실종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바그다드 대사관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걸 납득하기 쉽지 않다. 임 대사는 24일 바그다드 주재 대사관은 김씨 피랍 사실이 공식적으로 알려지기 전에 김씨를 포함, 동양인의 피랍설에 대해 어떤 첩보도 받은 바 없다고 거듭 주장했다.

의문 ⑥ AP 왜 서울서 확인했나

김씨 테이프를 받은 AP는 이 비디오를 당장 방영하지 않았다. AP는 사실 확인을 위해 6월 3일 외교통상부에 문의했다고 주장한다.

23일 AP 보도에 따르면 서울 주재 AP 기자는 외교통상부의 한 관리에게 김씨의 실종 혹은 피랍 여부를 확인했다고 한다. 당시까지 김씨의 피랍 사실을 모르고 있던 외교부 관리는 "현재 납치되거나 실종된 한국인은 없다"고 대답했다는 것이 AP의 주장이다. 임홍재 바그다드 대사에 따르면 AP는 바그다드 주재 한국대사관에 실종 사실을 문의하지는 않았다. 임 대사는 24일 기자들과 만나 "APTN으로부터 김씨의 피랍과 관련해 일절 문의받은 바 없다"며 "외교통상부 본부의 문의도 없었다"고 말했다.

AP는 왜 바그다드가 아닌 서울로 김씨의 실종 사실을 확인하려고 했던 걸까. 이라크에 거주하는 한국인은 고작 60여명이다. 만일 AP가 한국대사관에 이 사실을 문의했다면 사태 파악과 구명에 보름 정도의 시간을 벌 수 있었을 것이다.

암만=서정민 특파원, 최원기 기자

사진=송봉근 기자<bksong@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