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개방 쓴맛' 보는 국내증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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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기아사태 해법이 나왔을 때만 해도 만사가 해결된 듯했던 국내 증시가 하염없는 주가폭락속에 80년대 이래 최악의 붕괴위기를 맞고 있다.

종합주가지수가 사상최고수준으로 폭등한지 불과 이틀만에 폭락사태를 맞아 나흘간 무려 1백포인트 이상 빠지는 증시공황 상태에 빠져들자 증권전문가나 투자자 할 것 없이 말문을 닫고 말았다.

이쯤되면 불평불만이나 그 흔한 객장난동이라도 벌어질 듯 싶은데 증권가는 괴괴한 침묵만 흐르고 있다.

누구에겐가 분풀이하고는 싶은데 마땅한 상대가 없는 것이다.

이번 주가폭락의 '주범' 이 우리정부나 국내기관들이라기보다는 외국인이라는 점 때문이다.

예전 같으면 이번에 정부가 내놓은 각종 증시안정책이나 기관의 매수결의 등이 미흡하나마 주가안정에 큰 보탬이 됐겠지만 증시의 모양새를 보면 외국인들의 '팔자' 공세속에 전혀 약발이 먹혀들지 않고 있다.

92년 증시개방 이후 우리 주식시장은 외국인이 들고 들어온 뭉칫돈의 단맛만 보았지 쓴맛을 본 적이 없다.

증시체력이 달릴 때마다 외국자금이라는 영양제로 체력을 보충해 왔을 뿐 이들이 손을 털고 떠날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비싼 수업료를 내고 외국인의 위력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외국인투자자들은 원화환율 급등으로 인한 환차손을 덜려고 무조건 매도주문을 내고 있다.

여기에다 동남아 증시 위기가 가속화하자 같은 아시아 투자권에 속하는 한국 주식에 대한 보유비중을 줄여나가고 있다.

최근엔 미국.일본 등 선진국 증시마저 동반폭락해 투자심리가 급랭했다.

이러한 점들은 개방경제아래서 우리가 어찌할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국제적 악재들이다.

주가폭락에도 불구하고 손쓸 방도가 없다는 공포감.절망감이 외국인은 물론 국내기관과 개인투자자들까지 '팔자' 일색으로 만들어 우리 증시를 바닥모를 심연으로 가라앉히고 있는 것이다.

한 시황분석가는 "국내요인에 집착하다 보니 드넓은 세계에 눈을 돌리지 못했다" 고 자책하기도 했다.

도도한 개방화의 물결속에서 우리의 대응자세를 다시 한번 가다듬어야 한다는 다짐도 나왔다.

개방증시를 6년 가까이 이끌어온 우리가 이제는 걸음마 수준에서 벗어나 국제적 불확실성에 대비하는 성숙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점을 작금의 증시위기가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홍승일 <경제1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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