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이상한 논리 감춰진 논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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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이런 우화 (偶話)가 있다.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져 그만 기절하는 바람에 강물에 떠내려 갔다.

한참만에 깨어나 보니 어떤 외딴 섬에 도착해 있었다.

그 섬에도 원숭이가 살고 있었지만 모두 외눈박이였다.

그들 틈에 섞여 사는데 어찌나 구박이 심한지 견디다 못한 이 원숭이는 마침내 한 눈을 뽑아버리고 자기도 외눈박이로 살기로 했다.

눈을 뽑아버리자 다른 원숭이들이 비로소 그를 환대하기 시작했다.

갤브레이스는 그의 '불확실성의 시대' 란 책에서 '어떤 사회가 보다 역동적으로 진보.발전하지 못하는 경우 거기엔 반드시 기득권층의 음모가 존재한다' 고 했다.

민주주의는 집권자가 정권을 내놓을 각오를 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말도 있다.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피를 먹고 자라난 것' 이 된 까닭도 바로 권리를 내놓지 않으려는 기득권층의 저항에서 비롯된 것이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앞서의 우화나 갤브레이스의 지적이 딱 맞는 것 같다.

첫째로 집권 여당이 정국 혼란의 원인 제공자가 된 게 그렇다.

여당은 본래 안정을 특허품처럼 생각하게 마련인데, 지금의 여당은 스스로 천하대란의 불을 지피고 있다.

세상이 다 알다시피 정권을 내놓지 않으려 발버둥이다.

도대체 어느 나라의 공당 (公黨) 이 자당 후보의 지지율 하락을 이유로 판깨기를 모의한단 말인가.

정권재창출을 위한 노력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자신들의 재집권이 무슨 역사적 당위라도 되는 양 착각어린 행동을 서슴지 않고 있다.

스스로 민주정당이기를 포기한다면 모를까 국민이 내놓으라면 거기에 겸허하게 대응할 일이다.

더구나 경선으로 뽑은 후보를 돕기는커녕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들어 댄다.

그 핍박하는 모습이 마치 너도 한 눈을 뽑아내 우리처럼 외눈박이가 돼라고 강요하는 저 원숭이 사회의 이상한 논리를 닮고 있다.

둘째는 집권여당이 위법수단을 동원하면서까지 상대방에게 죄를 물으라고 강요하는 일이 그렇다.

비자금 파동의 근거가 된 자료들은 누가 보아도 실정법을 위반하고 있다.

그럼에도 법의 수호자여야 할 여당이 자신들의 위법성은 묻어놓고 상대를 법정에 세우려고 안간힘을 쓴다.

성경을 읽기 위해 촛불을 훔치지 말라고 했는데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진단 말인가.

더구나 실명제는 개혁입법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집권당이 개인의 예금비밀을 마치 제 수첩 뒤지듯이 마음대로 열어 볼 수 있다면 어느 누가 법을 믿고 은행을 신뢰하겠는가.

정치도 망치고, 경제도 망칠 짓을 여당은 오로지 기득권 수호 때문에 자행했다.

제 눈의 들보는 모른 척 했으니 그 또한 내가 하면 사랑이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해괴한 논리와 다르지 않다.

셋째는 일련의 부도사태에 대응하는 정부의 태도가 그렇다.

경제가 정치논리의 속박에서 벗어나 제 논리대로 굴러가야 바람직하다는 것은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와 있다.

이른바 시장경제 원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사안에 따라 늘었다 줄었다 하는 매우 편의적인 잣대로 대처했다.

누가 보아도 거기엔 감춰진 논리가 있었다.

짐작컨대 정권적 차원의 산술이었던 모양이다.

여론조사에서 DJ가 줄곧 부동의 1위를 달리고 있는 사실 그 하나가 여당으로 하여금 해괴한 일들을 하게끔 만들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DJ는 여전히 앞서가고 있다.

그때문에 혹시 YS의 중대결심이 또 한번 이상한 모양으로 표출되지 않을지 염려하는 소리가 높다.

천하대란 - 선거의 실종을 걱정하는 의견도 있다.

여당의 이상한 논리가 민주시대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을 떠올리게 만든 것이다.

YS가 개혁의 마지막 과제로 여기는 정치분야에서 깜짝쇼를 터뜨리는 게 아닐까. 아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

1955년 9월 유석 (維石) 조병옥 (趙炳玉) 박사는 해공 (海公) 신익희 (申翼熙) , 운석 (雲石) 장면 (張勉) 과 손잡고 집권 자유당의 독재에 맞서 민주당을 창당한다.

그리고 유석은 정권교체의 실현과 당의 분열방지를 위해 대통령 후보 경선을 포기하고 반대계파의 좌장인 해공을 추천한다.

'못살겠다 갈아보자' 던 해공의 한강 백사장 사자후는 그렇게 시작됐던 것이다.

YS는 유석의 정치제자다.

그 스승에서 그 제자로 이어지는 문민적 전통을 기대해 본다.

고흥문 <전국회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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