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서평]국토와 민족생활사…최영준 지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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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역사지리학을 광개토대왕 시절 영토가 어디까지였는가, 고조선의 위치가 어디인가를 연구하는 학문쯤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역사지리학은 영토.위치.지명만을 연구하는 분야는 아니다.

대학강단에서 자연지리학을 오랫동안 강의했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역사학과 지리학을 다른 학문과는 구별되는 종합과학으로 보았다.

그만큼 역사학과 지리학은 폭넓은 학문이며, 그러한 특징은 오늘날까지도 변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지리학의 한 분야인 역사지리학은 역사학과 지리학의 만남, 시간과 공간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니, 그만큼 넓고 깊고 어려운 분야이다.

'한국역사지리학 논고' 라는 부제를 단 '국토와 민족생활사' (한길사 刊) 는 역사지리학이 얼마나 유용하고 재미있는가를 글로 보여준다.

서울에서 태어난 평자는 중학교때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을 읽으면서 산골짜기 강원도 평창에 서는 5일장인 봉평장.대화장.진부장의 이름을 잊을 수가 없었다.

무척 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충청북도 제천의 제천장이 왜 거론되는지, 강원도의 장들과 왜 이어지는지 궁금했었다.

지금도 그 관계가 궁금한 사람이 있다면 이 책 속에 답이 있다.

칸트의 이야기처럼 모든 현상을 공간 (지역) 이라는 그릇 속에 넣음으로써 결합관계를 이루고 전체라는 개념을 갖게 됨을 이 책에서 본다.

제 그릇에 담겨 있는 물건을 보는 명쾌함과 안정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책 전체가 "한 지역의 생활사는 결코 한 시대를 대표했던 인물이나 그와 관련이 있는 사적 (史蹟) 으로 상징되지 않으며 오히려 역사의 뒷전에 가려진 백성들과 그들이 만든 방조제.간척지.수로.관개시설 등 토속적 경관으로 대표된다" 는 저자의 언급처럼 지리적 기반 위에 굳게 서 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 책은 동서양 지리관의 비교 속에서 한국의 역사지리적 특성을 추구하고 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 지리서인 '택리지' 를 통한 한국적 이상향의 모습, 강화도의 간척과 취락의 형성, 조선시대 한양의 교 (郊) 의 개념 등에서 그러한 특징을 볼 수 있다.

지리관.도시.촌락.가옥.수로에 이르는 주제의 광범위함, 고문헌.고지도에서 토양도.지질도에 이르는 자료의 광범위함, 충실하고 명쾌한 지도의 내용이 시간과 공간을 아우르는 역사지리학의 진면목을 보게 한다.

무엇보다도 돋보이는 것은 현지답사를 통한 자료의 수집이다.

이제는 사라져 버린 많은 전통들이 그래도 1970년대까지는 남아 있었음을 살필 수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책이 답사가 고도의 기술이자 예술임을 보여 준다는 점이다.

굳이 책의 흠을 잡는다면 기왕의 글을 모은데서 오는 체계성의 결여, 지리학 학술 용어의 딱딱함과 어려움, 한국의 역사지리학이 갖는 구체성과 특수성을 과학화로 연결시키는 노력이 부족한 점 등을 지적하고 싶다.

그러나 이는 사족 (蛇足) 이다.

필자의 생각대로 우리 선조들에게 지리란 곧 자연의 이치를 깨닫게 해주는 지혜의 학문이었음을 느낄 수 있다면 이 책의 본질에 도달한 것으로 자부해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여러 분야에서 각 지역의 특성을 주민의 생활사를 바탕으로 밝히는 일이 확산되어 공간 위에서 시간과 사람의 생활이 만나기를 기대해 본다.

양보경 교수 <성신여대·지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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